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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모의 자살 외경 본문
노사모의 자살 외경
본 필자가 내었던 책의 제목이 '삶은 의무입니다.' 였다. 삶은 의무다. 싫다고 또는 무겁다고 살아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무는 싫어도 힘들어도 치르고 가야 하는 마치 성인식과도 같다. 우리의 삶에는 겹겹이 이런 성인식 되는 조항들이 마치 공동묘지의 비석처럼 여기저기 널리어 있다. 우리는 하나를 넘고 다음을 넘고 또 다음을 넘고 그렇게 살아간다. 그 속에서 때로 행복한 날들도 있으리라.
인간의 삶이 이렇게 된 데에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따먹었기 때문이다. 그로써 하나님께서는 이후 땅이 아담에게 가시와 엉겅퀴 곧 저주를 낼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거기 아무 데도 자살해도 된다 라는 조항은 없었다.
자살은 땅이 낸 가시와 엉겅퀴를 받아먹기 싫다 하여 자기 자신이 자신을 향해 가시를 먹이는 일종의 저주 아래 있어야 하는 인간이 저주를 탈피하고 자신이 저주를 내리는 땅의 역할로 승격하는 자기높임 행위이기도 하다.
헌데 이것을 지금 노사모들은, 그의 심성이 너무 갸륵하고 깨끗해서 자살하셨다. 라고 미화한다.
그런 논리가 타당하다면, 지금 살아 숨쉬는 수천만, 아니 나아가 수억, 수십억명의 인구들은 모두 썩었고 더럽고 추악하며, 나아가 자살 않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까지 노무현에게 비하면 한량없이 추악하고 뻔뻔한 인간성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가히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 궤변인 것이다. 과거에 남상국 사장이 자살했을 때 어떤 노무현 지지성향을 보이던 교수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한다. 자살하면 국가세금으로 자살시체를 거두니, 그 돈도 아깝다. 자살세를 걷자. 하지만, 그 교수가 이번 노무현 장례식에 대해서는 그런 말의 비슷한 말장난도 하였다는 보도 없다.
노무현 자살과 노사모들의 눈물과 열광적 애도, 및 졸지에 살인정부가 되어버린 이명박 정부를 향한 일사불란한 매도행위를 보면서, 문득 나는, 여태 온갖 슬픔, 섦움에도 자살치 않고, 수치든 억울함이든, 가난이든, 무조건 묵묵히 견디고 아픔을 이겨내오던 나는 문득, 몹시 뻔뻔하고 낯짝 두꺼워서 여태 살아 왔나는 자기반성에 부딛치게 된다.
나의 정신이 뻔뻔한 것인가. 노무현의 정신이 허약한 것인가. 엄연히 후자인데도, 노사모들은 살아있는 우리가 뻔뻔하여 그렇다고 외치는 꼴이다. 떼를 지어.
그래 좋다. 나는 뻔뻔하여 살아 있다 손 쳐도, 허면 살아 숨쉬며 노무현 자살을 지지하는 노사모들은 왜 숨을 쉬며 지금도 살고 있는 건가 ? 이에 대하여는 대답이 없다.
저들의 증상을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까 ? 자살은 자기를 향한 살인행위이다. 오죽 하면 그랬을까 는 동정이야 물론 하겠지만, 때로는 왜 보다 버티지 않는가 는 질책도 자살자, 또는 자살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물어볼 만도 하다. 아니 물어야 한다. 헌데 그 지당한 물음은 삭 사라졌다.
현대 심리과학에서는 수도물에다 리튬을 극소량 섞으면 우울증을 예방하고 자살욕구를 줄일 수 있다 라고 하였다. 하지만, 장기간의 우울증을 겪는 것이 아니라면, 대개의 자살은 의지의 행위, 선택을 내리는 의지에 속한 행위다. 또 귀신론에서는 자살을 사람에게 끊임없이 부추기는 자살귀신이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자살귀신 조차, 본인에게 자살에의 염원이 있기 때문에 그 안(영혼안)에 집을 짓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노사모들이 노무현의 자살을 끝없이 두고두고 찬양한다면, 그것은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영, 즉, 자살귀신들을 대거 부추기고 그에 장단 맞추는 영적 발작병증일 수도 있다. 거기에 속지 말자.
삶이란, 단칼에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끊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걸린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바위위에서 뛰어내려 겉으로 보기에는 그가 삶에서 건너뛰어 죽음이란 저 피안에 한순간에 이르른 것 같이 보여도, 천국과 지옥을 다녀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삶과 죽음을 가름하는 문제는 그리 한 순간에 건너뛰는 것이, 영적 눈으로 볼 때는 아니란 것이 이미 분명하다.
숱한 사람들이 속고 있는 것이다. 첫째는 노무현씨가 훌쩍 건너뛰어 지금은 번뇌를 초탈하여 아무 것도 없는 세상으로 갔다 라고 믿는 속임이며, 둘째는, 노무현씨가 전혀 위대하지 않으며 위대한 정신과는 거리가 먼 사람임에도 위대한 인물, 위대한 정신으로 포장되어 속이는 속임이다.
세째는 살아있는 숱한 사람들을 욕뵈이기다. 자살을 미화함으로써.
이 모든 뒤에는 형편없이 나약한 정신을 숭상하는 그릇된 병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자살을 쉽게 여기게 만들려는 자살귀신의 속임수다.
생이란, 모든 것을 고려하여 최대한의 짐을 최대한의 인고로써 지어내는 그리하여 땅의 저주와 엉겅퀴, 가시덤불을 벗어나와 하늘나라로 가는 여정이다. 그것을 한순간에 벗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음이고 노무현씨는 일생일대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그의 장례식은 호화찬란하여도 영적으로는 그의 영혼은 그 날 그 시로 같이 사망했다. 영원한 사망.
우리는 자녀들에게 영원한 삶을 선택하도록 가르쳐야 하지, 영원한 사망을 선택하도록 가르쳐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영원한 삶은 바위 위에서 훌쩍 뛰어내리는 방식으로는 영영 가질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혼돈하고 있는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노무현씨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천년전, 십자가 위에서 인간이 겪어야 할 온갖 저주와 가시와 엉겅퀴를 몸소 질고를 지고 담당하여 죽으셨다는 것, 그리고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긍정과 삶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진리를 안다면 그는 뛰어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것을 진작 깨달았다면, 그의 삶이 그리 왼통 분열과 분노로 가득 차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나 더 말씀하여 둘 것은, 허약한 정신, 자살을 미화하는 그릇된 인식 아래에는, 유유상종, 동병상련하는 마음이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은 어린 시절 당한 부모로부터의 상처입음에 기인하며, 그 유년시절 패인 상처 때문에 자기존중, 자기만족이 불충분하여 타인이나 자신을 향한 분노로 쉽게 촉발된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가졌고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사람의 경우, 자살자에게 자기를 동일시하여, 자살자를 가련히 여기는 형태로써 자기애를 표출하기도 한다. 본질적으로, 자살이든, 자살자에의 숭배경향이든, 그 바탕에 깔린 것은 지독한 자기애, 자기를 끝내 못 버리는 이기심인 것이다.
노무현의 삶은 그만하면, 행복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행복을 보지 않았다. 그것이 설령 지나갔다 쳐도, 노무현에게 행복했던 시간이 있었던 것은 사실 아닌가? 하지만, 그의 영혼은 행복으로 배부르려 하기보다 마치 일시 지나갈 불행에 더욱 집착하는 경향을 보였고 그에 무너졌다. 자신의 행복은 당연시하였으되 자신에게 행복이 온 만큼 불행도 온다는 사실은 안 가르쳤던 것이다.
생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극도로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자살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 자신과 얽혀있는 가족과 타인을 염려하여 포기하는 편이 많다. 그러므로 그들이 삶을 선택한 이유는 뻔뻔하여서가 아니라, 진실성, 책임감이 월등 - 자살자들보다 - 강하여 그런 것이다. 더 나아가 주님의 부르심, 하나님을 향한 의무까지 그들은 생각한다.
그러므로, 삶을 살아가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뻔뻔하고 자살한 노무현은 고결하여 그렇다는 식의 노사모의 주장은 궤변이고 철저한 왜곡이다.
우리는 생을 선택하는 편에 섰다. 나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주님이 계시고 계시는 한. 그리하여 영원은 우리 편이고, 사망은 저들의 편이 이미 되어버렸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는 각자의 선택이다. 생은 진실의 편이다. 그리고 산다는 것은 아픔을 매일매일 직면하고 견디고 느낄 줄 아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바위에서 뛰내리듯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2009.5.26. 파아란 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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