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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노벨상 수상 공작 전모 외

새벽이슬1 2009. 3. 26. 23:05

 

 

"김대중 노벨상 수상 공작 전모"

김기삼씨는 내셔널 프레스센터'에서 "김대중 노벨상 수상 공작 전모"를 폭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본인(김기삼)은 국정원 대외협력실에 근무할 때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 공작" 에 직접 관여하였고 모든 자료에 근거하여 오늘 폭로한다.

2. 김대중은 국정원을 시켜 막대한 국가 예산을 쏟아 부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 위한 비밀공작을 전개하였다.

3. 김대중은 작전의 일환으로 1998.1 노벨상에 영향력이 큰 메리아센 스웨덴 외무차관을 청와대로 초청하였다.

4. 김대중은 1998,3 역시 국정원을 시켜 노벨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벌커 스웨덴 국회부의장을 초청하였고.

5. 1998,3.과 1999,12. 두 차례에 걸쳐 역시 노벨상에 영향력이 큰슐만 노벨재단 사무총장을 초청하였고.

6. 2000,8 역시 노벨상 수상에 영향력이 큰 본데빅 노르웨이 총리를 초청하였고

7. 초청에 필요한 왕복여비, 체재비, 선물 등 일체의 경비를 국정원에서 지불했다

8. 1998년8월에는 '감옥에서 대통령까지'라는 김대중을 미화하는 책을 스웨덴어로 번역 출판하여 스웨덴에 뿌렸고.

9. 정몽헌 회장을 시켜 김정일에게 15억 달러(1조 5천억원)를 전달하였고.

10. 이러한 비밀을 끝까지 숨기기 위해 정몽헌 회장을 살해하지 않았나 의심되며11. 김정일이 이러한 엄청난 비밀을 발설하지 않게 하기위하여 노무현을 시켜100 억달러~200억 달러(10조~20조원)를 추가로 전달하였다.

 

김기삼씨는 1964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1993년 국정원에 7급 공채로 입사하여 대공정책, 해외조사실, 국정원장 비서실, 전략실을 거쳤다. 그 후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인 김한정씨와 함께 ‘대외 협력관실'에 근무하면서 "DJ 노벨상 수상 공작" 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극비 자료를 챙겨 2001년 11월 미국으로 건너가 있다가 2003년 12월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여 지난 4월15일 미국정부로부터 망명 허가를 받았다. DJ의 비밀을 폭로할 수 있는 신분상 보장을 받은 것이다.

 

미국은 망명 신청을 받아들이기 전에 신청자의 과거 신분을 세밀히 조사하여 망명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판단될 때 망명을 허가한다. 김기삼씨가 망명을 허가 받은 것은 김기삼씨의 폭로 내용이 신빙성이 있음을 의미하므로 파장이 클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은 4월15일 이명박 대통령이 방미하던 날에 박지원을 데리고 부랴부랴 미국으로 떠났다. 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서라고 생각을 한다. 아마 해결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이뿐인가 미국에 미화를 007가방으로 10여 차례 옮겼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것도 챙기려 갔다는 결론이다. 어디 두고보자구!!! 김기삼씨 폭로!!!

'LA 유니티프레스'에서 옮김

 

 

방화범을 민주투사로 둔갑시킨 다섯 재판관

헌법재판소에도 지역적 편파성에 따라 판결했는가?

 

윤영철 출생 1937년(전북) 현 소속 법무법인(유한) 로고스 고문변호사

김경일 출생 1944년(광주) 직업 변호사

전효숙 출생 1951년(전남)

이공현 출생 1949년(전남) 현 소속 헌법재판소 재판관

조대현 출생 1951년(충남) 현 소속 헌법재판소 헌법재판관

 

放火치사범들을 민주인사로 뒷받침해준 재판관 5명 명단

 

2002년 김대중 정권하의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가, 경찰관 7명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부산 동의대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결정한 것에 반발, 경찰 유족들이 “故人의 명예가 실추됐다”며 낸 헌법소원을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5대 4의 결정으로 각하했던 일이 다시 쟁점이 되고 있다.

 

당시 “보상심의위원회의 결정은 취소돼야 한다”고 소수 의견을 냈던 周善會 전 헌법재판관은 지난 25일 동아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보상심의위원회 결정의 부당성을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 동의대 사건과 재심 추진은 동아일보가 적극적으로 보도하여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다. 노무현 정권 시절의 헌법재판소가 민보상위원회의 그릇된 판단을 바로 잡을 수 있었는데,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구사하여 좌파정권의 反대한민국적 행패에 코드를 맞춘 것은 두고두고 오욕으로 기록될 것이다.

 

다수 의견인 각하 결정을 내렸던 윤영철(尹永哲), 김경일(金京一), 전효숙(全孝淑), 이공현(李恭炫), 조대현(曺大鉉) 재판관은 “동의대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한다고 해서 순직 경찰관들이 곧바로 부정적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고 했었다.

 

소수 의견을 낸 권성(權誠), 김효종(金曉鍾), 송인준(宋寅準), 주선회(周善會) 재판관은 “화염병을 사용해 7명의 무고한 경찰관을 숨지게 한 행위는 자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봐야 한다”며 “다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했었다. 放火치사범들을 민주인사로 만드는 일을 뒷받침 해준 다섯 판사들은 폭도들이 자신들의 집을 불태워 일가족이 沒死(몰사)하였을 때도 그 폭도들을 민주인사로 인정하였을까?

 

이 다섯 명의 이름을 국민과 역사는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조갑제닷컴]

 

주선회 전 재판관 인터뷰 요약 (동아닷컴).

헌재의 결정문 소수 의견에 “민주화운동 결정을 취소해야 한다.”고 했는데….

주선회: “통상적으로는 주문만 써서 발표하는데 그 사건은 내가 직접 소수 의견을 작성해 명기하자고 했습니다. 동의대 사건은 입시부정이라는 학내 문제로 학생들이 시위를 하다가 경찰관 7명을 희생시킨 사건입니다. 헌법과 법률에 의해 주어진 정당한 공권력을 행사하는 경찰에게 화염병을 던져 목숨을 앗은 사건이에요.”

 

―보상심의위원회는 동의대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죠. 헌법과 법률을 떠나서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보상심의위의 결정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거예요. 시위대에 감금된 전경 5명을 구하려는 경찰관에게 화염병을 던져 죽음으로 몰고 간 사건이 민주화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어떤 기준으로 민주화운동을 평가해야 합니까?

 

“민주주의는 목적과 결과보다 절차와 수단이 더 중요한 제도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비효율적인 제도라는 것이죠. 절차와 수단이 정당해야 민주주의가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동의대 사건은 절차와 수단도 잘못됐지만 목표 자체도 잘못된 ‘테러’에 불과합니다.”

 

―당시 유족들이 ‘보상심의위의 민주화운동 인정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헌법소원을 제기했는데 헌재는 ‘유족은 직접 당사자로 볼 수 없다’며 각하 결정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안타깝고 아쉬워요. 각하 결정은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논리로 피해간 것입니다. 그러려면 憲裁가 존재할 이유가 없어요. 그 사건은 헌재가 정면으로 치고 나갔어야 해요. 유족이 ‘자기 관련성’이 없다면 죽은 사람 보고 헌법소원을 내라는 말인가요. 국가기관에 의해 유족의 명예가 실추됐다면 법률적, 직접적 이해관계가 있다고 봐야 해요.”

 

―헌재 결정문에는 ‘보상심의위원회의 결정이 경찰관과 유족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볼 수 없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동의대 사건 처벌자를 민주화운동자로 인정하더라도 경찰의 명예가 실추되지 않는다는 논리죠. 희생된 경찰관이 국립현충원에 안장돼 국가유공자로서 예우를 받고 있고 이들에 대한 법적 평가에도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설득력이 있습니까. 이해가 엇갈리는 사건에서는 한쪽이 이익을 보면 다른 쪽은 불리해지는 게 상식이죠.”

 

주 전 재판관은 결정문 소수 의견에 ‘사건 가담자들에게 명예와 보상을 부여하는 순간 법질서의 수호자로서 순직한 경찰관들이 받아야 마땅한 사회적 평가와 추모는 격하될 수밖에 없다’고 명시했다.

 

―한나라당이 보상심의위원회 결정에 대해 재심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정치권에서 논란이 예상되는데요….

 

“철장에서 새를 풀기는 쉬워도 다시 잡아넣기는 쉽지 않습니다. 비록 권위주의 통치시대에 벌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동의대 사건은 정당한 공무집행으로 인정받은 사건이에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바로잡을 수 있다면 바로잡아야 합니다.”

 

-소급 입법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지 않을까요?

 

“보상심의위원회의 결정은 일종의 ‘정치적 선언’입니다. 법률적 행위가 아니죠. 그 위원회가 판단할 수 있는 시효를 늘리는 것이기 때문에 소급 입법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동아일보 요약: 부산 동의대 사건은 1989년 5월 입시 부정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과격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이 감금된 전경들을 구하려는 경찰에게 화염병을 던져 7명의 경찰이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 주동자 31명은 특수공무방해치사죄로 징역 2년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2002년 4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이 사건 관련자 46명을 민주화운동자로 인정했다. 이에 유족들은 “명예가 훼손됐다”며 헌법 소원을 제기했지만 헌법재판소는 2005년 재판관 5 대 4로 각하 결정을 내렸다. 당시 소수 의견을 낸 4명의 재판관은 “무고한 경찰의 생명을 빼앗고 민주질서를 후퇴시킨 사건”이라고 밝혔었다.

 

올해 2월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은 재심을 법적으로 가능케 하는 관련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동아일보는 전 의원의 관련법 개정안 소식을 2월 25일자 A1면과 A4면에 단독 보도했다. 이는 이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는 계기가 됐다.

 

개정안은 ‘위원회의 결정에 중대 변경 사유가 발생했을 경우 신청사건의 심의를 완료한 후 1회에 한해 직권으로 재심을 할 수 있다. 재심의 시효는 10년으로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 의원은 다음 달 2일 법안을 제출할 예정이다. 법안이 통과되면 동의대 사건 등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가 지난 10년간 결정한 모든 사건을 재심할 수 있게 된다.

 

[사법개혁 네티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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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아버지 노판석 이야기

< 읽어보시고 널리 전파 바랍니다. >

 

노무현의 부친 노판석은 6.25 당시 인민군의 앞잡이 역할을 했다, 노무현의 고향은 전라남도 강진, 1953년 노무현이 5살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약 20~30명가량의 사람들을 무고하게 살해했다고 전해온다.

 

노판석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했다. 노판석에게는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가 철천지원수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노무현은 좌익들이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려 할 때 못 본 체 했다.

 

* 노판석은 왜 빨치산이 되었나?

 

노무현의 조부가 일제시대 때 일본군 앞잡이 노릇을 했기 때문이라 한다. 해방이 되자 동네 주민들로부터 엄청난 괄시와 무시를 당하게 됐다. 이에 노판석은 동네 사람들에게 큰 앙심을 갖고 있다가 6.25가 터지고 나서 괴뢰군이 전남 강진을 점령하자 괴뢰군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 철저한 앙갚음을 하다가 인천상륙작전 이후,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하게 됐다고 한다.

 

빨치산들에게 자발적으로 식량과 물품을 대줄 민간인들은 없었기 때문에 여느 빨치산처럼 노판석 역시 지리산에서 가까운 남원 부근에서 민간인들을 살해하지 않았겠나 하는 의혹이 있다 한다.

 

1953년 아군이 괴뢰군을 격퇴하고 남한 전역에 치안과 질서를 확립해 나가자 노판석은 동네사람들에게 보복을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노무현(5살)과 노건평을 데리고 목포항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타고 야반도주를 했다.

 

동네 사람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배편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다. 가족을 데리고 부산항에 도착한 노판석은 산골 오지인 경남 진영으로 도망을 간다. 그곳서 호적을 새로 만들었다 한다.

 

당시에는 전란 직후의 혼란기로 호적을 새로 만들기가 매우 쉬웠다. 그리곤 또 다시 김해로 도주를 했고, 이후부터 노무현 집안은 경상도 출신 행세를 해온 것이라 한다.

노무현은 김해에서 역시 6.25 당시 인민군 앞잡이 노릇을 하던 권오석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된다, 권오석은 6.25때 인민군 앞잡이로서 지역주민 11명을 살해한 경력이 있다.

이후 노무현은 고시에 합격하고 판사직을 채 1년이 못되게 하고 난 후 변호사 개업을 한다. 이때 노무현을 도와준 이가 김광일 변호사다. 김광일 변호사는 수습 변호사로 자기 사무실에 온 노무현에게 돈까지 빌려주면서 노무현의 변호사 개업을 도와준다,

 

이 때 빌린 돈은 불과 3개월 만에 다 갚았다. 김광일 변호사는 자신이 맡은 시국사범들에 대한 인권 변론을 하는데, 노무현과 문재인을 참여 시키기도 했다.

 

김광일 변호사 덕에 시국변론을 몇 번 하던 노무현은 김광일 변호사 덕에 김영삼 민주당 총재를 알게 된다,

 

YS의 추천으로 공천을 얻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된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지 훨씬 지난 후 책을 출간했다. 책에서 노무현은 'YS로부터 봉투를 많이 받아서 원도 없이 써봤다' 라고 썼다. 그리고 5공 청문회가 열렸다.

 

노무현은 이때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집어 던졌고 이 덕분에 호남지역사람들과 DJ 눈에 들게 됐다. 얼마 후 민자, 민주, 자민의 3당 합당 반대에 나서면서 이를 명분으로서합당을 극렬 반대 했고,꼬마민주당에 잠시 머물다 DJ 진영에 합류했다.

 

이후 DJ와 노무현의 관계는 양부, 양자 관계까지 발전을 하게 된다. 노무현 장인 권오석의 정체 권오석에 의해 학살된 양민유족 중에 변재환 박사(58세)가 있다. “권오석에 의해 살해된 유족회”대표다. 그는 권오석에 대해 이렇게 털어놨다.

 

"權오석씨는 태생부터 장님은 아니었다. 막걸리를 공업용 알콜에 섞어 마시다가 실명된 것이다. 실명한 權은 6.25가 일어나기 전인 1948년에 남로당에 가입했다.

 

당시 우리 숙부님인 변백섭은 면장이었고 권오석은 면서기였다. 권씨는 사상관계로 의심을 받아 다른 면에 있다가 쫓겨 와, 변백섭 면장 밑에서 일을 하게 됐다.

 

이후 6.25가 나자, 권오석은 창원군 진전면의 치안대장이 되었다. 눈이 먼 권씨는 동네 사람들의 손바닥을 만져보고 사람을 죽일지 살릴지를 등급별로 판정했다."

 

2002년 5월 3일,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노무현은 장인의 묘소에참배를 하면서 “장님(장인 권씨)이 부역을 하면 얼마나 했겠느냐”,“조금 가담하고 더 가담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국민을 속인 것이다.

 

같은 시기에 권양숙은 아버지 권씨에 대해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때 나는 어려서 부모님 일은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태생이 장님인 사람은 혼자서도 잘 다니지만, 후천적으로 실명한 권씨의 경우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권씨의 경우 장님이 된지 얼마 안 되었고 남편이 양민을 등급별로 손으로 판정하고 있을 때,옆에서 부축했던 사람이 바로 노무현의 장모였다.

 

노무현 부부의 거짓말에 대해 변씨는 이렇게 반박한다. “장모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말이 되나. 나는 권양숙씨와 동갑이다. 나도 아버지를 통해 숙부님의 학살사건을 낱낱이 듣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어렸다는 이유로 모른다는 것인가?

 

더욱이 아버지가 감옥에 있을 당시 권양숙은 15살이었는데 아버지가 왜 감옥에 갔는지 들었을 것 아니냐? 우리가 알고 있는 3.1운동이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아서 안 것은 아니지 않나.” “학살당한 11명의 유족들은 궁핍하게 살았다.

 

 6.25 이후 부모 두 사람이 있어도 어려운 살림인데 아버지 없이 산 유족들은 그야말로 피눈물 흘리던 세월이었다. 미안하다는 한 마디만 했더라면 유족들은 부모형제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살았을지 모른다. 노무현 부부와 장모는 죄 없이 죽은 11명의 양민들을 위해서라도 진실을 제대로 알리고 사과해야 한다.”

 

권오석의 좌익 부역활동을 뒷받침하는 기록은 대검찰청이 발간한 ‘좌익사건실록’에 있다. 피해자측 증언들에 따르면 권오석은 일제시대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면서기로 일했을 정도로 똑똑해서 양민을 학살하기로 결정한 인민재판에서 검사, 변호사, 판사 역할 등 1인 3역을 한 유일한 재판관이었고, “그의 말 한 마디로 양민의 생사를 결정되었다.”고 한다.

 

'실록' 책자에는 권오석이 죽인 피해자가 9명으로 돼 있다. 그러나 피해자 측은 11명이라고 주장한다.

 

卞百燮(43, 농업) 창원군 진전면 양촌리

卞先燮(34, 농업)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卞曾燮(33, 농업) 창원군 진전면 양촌리

金玉甲(53, 농업)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金万祚(32, 농업) 창원군 진전면 시락리

金聖甲(46, 농업) 창원군 진전면 창포리

朱正浩(28, 군인) 창원군 진전면 봉암리

朴宗洙(51, 區長)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朴周漢(47, 농업)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鄭奉柱(32, 농업) 창원군 진전면 광촌리

權五乾(28, 군인) 창원군 진전면

 

피해자 유족의 주장 중에는 권오석이 얼마나 철저한 공산주의자였고,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였기에 시각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노동당 선전부장으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또 치안대가 되었겠는가? 눈이 멀쩡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시각장애인을 간부로 기용한 사실은 권오석의 좌익사상이 투철하였고 좌익 활동에 적극적이었음을 방증하고 있다고 한다.

 

송정호 법무장관은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 답변에서,「양민학살로 수감 중이던 권오석이 자유당 정부 시절인 1956년 폐결핵 등의 질병 때문에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났고, 5.16 이 나기 두 달 전인 1961년 3월27일 재수감됐다」는 요지로 답변했다.

 

김일성이 죽기 전 남조선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동지들과 의형제, 그리고 막내 동생과 그리운 여인. 이들 4명을 가장 만나고 싶어 했다고 한다.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은 일본의 左派 거물 정치인 故 우스노미야 參의원과 김일성 사이에 1974년 9월 평양 대동강 별장에서 2박3일 회담을 하고 남긴 '김일성-우스노미야 단독회담 보고서'라는 비밀 보고서가 일본 공안 조사청 지하실과 평양 김일성 궁전 비밀금고에 남아 있다.

 

그 보고서에 의하면 김일성은 우스노미야 를 통해 "우스노미야 선생과 나는 형제간 이고 내가 2살 더 많으니 형이 되는 셈이지요. 또 아우님과 남조선의 김대중이 형제지간 이라고 하니 우리는 3형제가 되는 셈입니다.

 

우리 3형제가 손을 잡으면 아시아에서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우님께서 일본 총리가 되시고 막내 아우님인 김대중이 남조선 대통령이 되면 우리 3형제가 손을 잡고 미 제국주의자들에 대항, 큰소리치는 아시아의 龍이 될 것 입니다"라고 말했다.

 

김일성이 또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韓完相 대한적십자 총재이며, 그가 그토록 그리워한 여인은 前 YWCA 총재를 지낸 孫寅實 여사였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를 넘어서'를 보면 손인실 여사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상당부분 묘사돼 있는데 한때는 남조선으로 밀사를 보내 북한으로 탈출시키려고 까지 했었다.

 

그 다음으로 꼭 만나고 싶어한 - 평양으로 탈출까지 시키려 했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북한 로동당·빨치산 혁명투쟁 교육시간에 등장하는 '남조선 남로당 권오석 동지의 투쟁사'의 그 권오석이다.

 

권오석 동지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임에도 6.25 민족 통일전쟁(?) 에 앞장서 남조선 반역자들을 가려내 처단하는데 혁혁한 攻을 세웠으며, 馬山지구 전투에서 미군 몇 명을 포로로 잡아 오는데도 큰 공을 세웠다.

 

그는 패전 후 이승만 정권에 체포됐으나 끝까지 사상 전향을 하지 않은 채 북조선 조국을 배신하지 않겠다며 감옥 안에서 최후를 맞은 영원히 수령님 가슴 속에 남아있는 '남조선 빨치산 투쟁 영웅' 이었다.

 

그 위대한 '남조선 빨치산투쟁 영웅'의 사위가 남조선 대통령이 되고 그 딸이 청와대 안주인이 되어 입성 하는 날, 평양 방송은 며칠 동안 권오석 동지의 공로와 그 영웅의 사위와 딸이 남조선 대통령이 된 사실을 방송하며 '위대한 김일성 수령님의 정신이 승리했다'고 열 올리며 광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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