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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복 선생님, 저는 KAL 858기 폭파사건의 장본인인 김현희 입니다.
지금 인민재판을 당하고 있습니다." | 李東馥
김현희(金賢姬)는 한반도 분단사가 만들어 낸 또 하나의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는 1987년 1년 앞으로 박두한 88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훼방하려고 북한독재정권이 저지른 만행이었던 대한항공 858기 폭파의 2인조 폭파범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 공중폭파 사건으로 탑승했던 승객과 승무원 115명 전원이 사망했다. 폭탄이 설치된 858기가 기착했던 UAE 아부다비 공항에서 비행기를 내려서 도주를 시도했던 2인조 폭파범은 바레인 공항에서 체포되는 과정에서 남성 공범(김승일)은 음독자살했고 음독자살 시도에 실패한 김현희는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김현희는 이 폭파 만행의 공범으로 대법원에 의해 사형판결이 확정되었지만 서울에서 수사기관에게 사건의 전모를 진술함으로써 이 사건이 북한에 의하여 자행된 국가범죄였음을 입증하는 산 증인이 된데 대한 장공속죄(將功贖罪)의 차원에서 특별사면 처분을 받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더구나, 김현희는 그가 특수공작원으로 훈련을 받는 기간 중 만났던 납북 일본인 여성(일본 이름: 다구치 야에코ㆍ북한 이름: 리은혜)의 존재를 밝힘으로써 일본과 북한 사이에 납북일본인 문제를 새로운 외교 현안으로 부상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은 북한이 범행을 부인하는 가운데 국내의 친북ㆍ좌파 세력에 의한 끈질긴 조작 시비의 대상이 되었다. 이 와중에서 필자는 엉뚱한 일로 김현희 문제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것은 김현희가 1972년11월4일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공동위원장(이후락ㆍ李厚洛) 일행의 평양 방문 때 이들 일행이 탑승한 북한군 M18 헬리콥터가 평양 대동강 남쪽 역포의 간이 착륙장에 착륙했을 때 영접을 나왔던 화동(花童)의 하나로 바로 필자에게 꽃다발을 안겨주고 또 필자의 목에 붉은 스카프를 걸어준 소녀였음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김대중(金大中) 씨가 이끄는 좌파 정부가 출범한 이후 한 때는 필자 또한 좌파세력에 의해 858기 폭파사건 조작 시비의 입방아 질에 오르내리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노무현(盧武鉉) 정권 때는 국가정보원 안에 특히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의 조작되었다는 주장을 입증하는 것을 목적 중의 하나로 하는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가 내노라 하는 친북ㆍ좌파 인사들로 구성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작년 오히려 문제의 858기 폭파가 실재(實在)했을 뿐 아니라 북한의 지령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인정하는 내용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필자의 뇌리에서는 그것으로 이 사건이 사실상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필자의 희망이었을 뿐이었다. 엉뚱한 일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하순 어느 날 필자는 난 데 없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남자는 자신이 김현희의 남편이고 김현희가 필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있다면서 만나기를 희망했다. 필자는 그날 저녁 필자의 집 근처 한 허름한 한 식당에서 김현희의 남편을 만나 그로부터 김현희가 필자에게 쓴 장문의 편지를 받아 보게 되었다. 즉석에서 읽어본 김현희의 편지 내용은 한 마디로 충격적이었다. 좌파 정권 10년 동안에 이 나라의 정권기관과 TVㆍ방송 매체를 장악한 친북ㆍ좌파 세력들은 국가기관과 TVㆍ방송매체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김현희와 그의 가족에게 과거 이디 아민이 지배하던 우간다에서나 있었음직한 인권유린 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그들이 자행한 인권유린 행위를 통하여 그들이 달성하고자 했던 목적이 이 편지를 읽는 필자로 하여금 치를 떨게 만들었다. 그들은 김현희에게 “858기 폭파사건은 북한이 저지른 것이 아니라 남한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라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강요했었다. 더욱 분노를 금할 수 없는 것은 국정원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가 858기 폭파사건이 실재했던 사건이라는 결론을 내린 뒤에도 이들 친북ㆍ좌파 세력은 김현희를 괴롭히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제 그들은 김현희에게 TV와 방송을 통해 “그러나 858기 폭파사건을 김정일(金正日)이 지시하지는 않았다”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할 것을 끈덕지게 강요했고 이를 감당하지 못한 김현희로 하여금 어린 아들딸과 함께 집을 버리고 동가숙ㆍ서가식(東家宿ㆍ西家食)의 유랑생활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김현희의 남편이 전해 주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들 가족은 ‘안전’에 대한 위협 때문에 전화마저 소유하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김현희의 처지에 대해서는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고 여겨진다. 그러한 뜻에서 아래에 김현희가 필자에게 보낸 편지 전문을 소개한다. 읽는 분들이 이 글을 읽어 본 뒤 김현희로 하여금 더 이상 이 나라의 좌파 세력으로부터 이 같은 부당한 인권탄압을 당하지 않을뿐더러 그 동안 있었던 일과 관련하여 정의(正義)를 회복시켜 줄 수 있게 하는 방안을 함께 마련하는 데 동참해 주도록 간곡하게 호소한다.
2008.11.25
李東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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