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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가 탄생하기까지!

새벽이슬1 2007. 4. 8. 06:59
...인물칼럼
애국가가 탄생하기까지 ... 안익태 선생
.인물칼럼


사랑하는 나의 조국 우리 정부가 채택한 애국가는 본인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본인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우리 동포에게 전달한 것뿐입니다.
이 아름다운 선물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일을 하렵니다.
운동경기나 행사 때 마다 애국가를 부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이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 알고 있을까?

애국가의 작곡가가 안익태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찾기 힘들 것이다. 안익태는 평양의 숭실학교 2학년 때 ‘일본 경찰에게 체포될 수 있으니 집 밖에서는 절대로 부르지 말라’는 주의를 받으며 상급생으로부터 애국가를 배웠다. 이 때 배운 애국가는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멜로디에 가사를 붙인 것이었다. 더욱이 그 상급생은 애국가 가사를 어설프게 전해 들어 전부를 알고 있지 않았다. 안익태는 그 가사를 정확하게 알려고 애를 썼으나 방법이 없었다. 이때부터 그는 누구나 애국가를 떳떳하게 부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며, 남의 나라 민요 곡조에 붙인 애국가를 부를 때 마다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을 삼켰다.

1919년 항일 운동으로 투옥될 위기에 놓였던 안익태는 숭실학교장인 마우리 박사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투옥 대신 추방 명령을 받고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그 때 마우리 박사는 안익태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항일 운동을 하는 것도 민족을 위한 일이지만, 더 훌륭한 길은 안 군의 비상한 음악적 재능을 살리고 가꾸어 그것으로 애족하는 일이네. 안 군의 소원인 애국운동을 음악을 통해서 하게나.” 그래서 안익태는 마우리 박사의 환송 속에 교인들의 찬송 소리를 들으며 평양을 떠났다.

일본에 가서 차별과 서러움 속에 중학 5학년 과정을 마친 안익태는 1926년 4월, 도쿄 국립음악학교에 입학해서 본격적인 음악교육을 받았는데, 전공인 첼로뿐 아니라 작곡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입학한 지 두 달도 채 안되어 그는 일본 순회연주를 했고, 여름방학에는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 재건기금 모금을 위한 고국연주여행을 하게 되었다. 여러 도시에서 독주회를 가진 후 모교인 숭실학교에서 특별연주회를 열었다. 은인인 마우리박사와 일본경찰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연주를 한 감격적인 무대였다. 이 독주회에서 안익태는 앵콜곡으로 애국가를 변주곡으로 연주하는 모험을 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이 스코틀랜드 민요의 의미를 알아 차리지 못했다.

안익태가 여러 가지 역경 속에서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5월 평양으로 다시 돌아 오자, 일본 경찰들이 그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예배 중인 교회 밖에서도 기다리며 지키는 등 조국에서 자유롭게 음악활동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미국 유학을 결정했다. 고국을 떠나기 전 송별 연주회를 열고자 했으나 일본 경찰이 허락하지 않았다. 몇 년 전 평양 연주회 때 안익태가 조만식 선생과 함께 평양 종로 거리에서 가두 행진을 한 사실을 기억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여객선 제퍼슨 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한 안익태는 그곳 한인교회를 찾아 갔다. 교회 뜰 국기 게양대에는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숭실학교 시절 상급생들이 어렴풋하게 설명해 주었던 바로 그 태극기였다. 그 교회의 예배시간, 목사님의 묵도 후 교인들이 모두 기립하여 애국가를 외워서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를 함께 부르며 안익태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우리의 애국가를 만들자. 하나님이 도와 주실거야” 그는 한인교회 목사로부터 애국가 가사를 정확하게 받아 적었다. 안창호 선생이 대한민족의 단결을 촉구하기 위하여 이틀 동안 금식 기도하며 지은 가사이고, 삼천리 반도 금수 강산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보우하사’라는 구절을 넣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안익태는 이 가사에 알맞은 애국가를 작곡하겠다는 결심을 밝혔고, 그 곳을 떠날 때 목사로부터 애국가를 작곡할 때 사용하라고 만년필을 선물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내에서 활동을 시작하려던 안익태는 음악의 본고장에서 대성하리라는 꿈을 안고 베를린으로 향한다. 베를린에서 그는 한 동안 접어 두었던 애국가 작곡에 다시 몰두하기 시작한다. 1936년 6월의 어느 날 이른 아침, 그는 꿈결에 귓가를 스치는 멜로디에 잠을 깨었다. 그 악상은 그가 기다리며 고심해 왔던 바로 그 멜로디였다. 안익태는 오선지 위에 그 악상을 옮겨 적었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우리의 애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안익태는 그 멜로디에 반주를 붙여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목사와 대한국민회로 보냈고, 이 애국가는 점차 미국 내 교포들과 유학생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대한국민회는 또 이 애국가를 대량으로 복사하여 중국 상해임시정부로 보냈다. 국내로는 쉽게 전해질 수 없어서 만주, 시베리아 벌판을 떠돌아 다니던 애국가는 광복 투사들이 해방 후 귀국하면서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게 되었다. 1948년 독립을 선포한 정부는 이 애국가를 대한민국의 국가로 정식 채택하였다. 미국에서 이 소식을 들은 안익태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나의 조국 우리 정부가 채택한 애국가는 본인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본인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우리 동포에게 전달한 것뿐입니다.
이 아름다운 선물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일을 하렵니다.”


글 : 지혜련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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