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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새벽이슬1 2007. 4. 8. 07:17
대한민국 역대대통령
 ...인물칼럼


 
 
이승만 (李承晩)
1875년 4월 18일 출생 (*사망)
전 정무직공무원/독립운동가
재임기간 : 1948.07 ~ 1960.04
 
윤보선 (尹潽善)
1897년 8월 26일 출생 (*사망)
전 정무직공무원, 전 국회의원
재임기간 : 1960.08 ~ 1962.03
 
박정희 (朴正熙)
1917년 11월 14일 출생 (*사망)
전 정무직공무원, 전 군인
재임기간 : 1963.12 ~ 1979.10
 
최규하 (崔圭夏)
1919년 7월 16일 출생
전 정무직공무원
재임기간 : 1979.12 ~ 1980.08
 
전두환 (全斗煥)
1931년 1월 18일 출생
전 정무직공무원, 전 군인
재임기간 : 1980.09 ~ 1988.02
 
노태우 (盧泰愚)
1932년 12월 4일 출생
전 정무직공무원, 전 군인
재임기간 : 1988.02 ~ 1993.02
 
김영삼 (金泳三)
1927년 12월 20일 출생
전 정무직공무원, 전 국회의원
재임기간 : 1993.02 ~ 1998.02
 
김대중 (金大中)
1926년 1월 6일 출생
전 정무직공무원, 전 정치인
재임기간 : 1998.02 ~ 2003.02
 
노무현 (盧武鉉)
1946년 8월 6일 출생
현 정무직공무원, 전 변호사
재임기간 : 2003.02 ~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은식(朴殷植) 1859년 9월 30일 출생 (*사망) 전 대통령, 전 독립운동가, 전 사학자 전 임시정부 대통령

 

백암 박은식은 일제 강점기 상하이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2대 대통령으로 근대 이후 일제의 침략과정을 서술한《한국통사(韓國痛史)》와 이에 맞서는 독립운동사인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펴내 민족사관을 정립하였으며, 한국근대사를 주체적으로 서술하고 국가나 민족의 흥망은 ‘국혼(國魂)’에 있는데 국혼은 바로 역사에 담겨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국가의 독립을 위해서는 주체적 역사서술과 역사관의 교육이 중요시 해야 한다고 했다.

 

이승만(李承晩) 1875년 4월 18일 출생 (*사망) 전 대통령, 전 독립운동가 전 대한민국 대통령 제1.2.3대

 

독립운동가·초대대통령. 호는 우남(雩南). 황해북도 평산(平山) 출신.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0년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으로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당하자 친일정권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96년 서재필(徐載弼)이 미국에서 돌아와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자 이에 가담하였으며,《협성회보》와《매일신문》의 주필을 지내면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개화·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고 중추원 설치를 주장하다가 98년 황국협회의 무고로 체포, 투옥되었으나 1904년 출옥하였다. 그해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에 건너가 T.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0년 국권피탈 뒤 귀국, 이상재(李商在) 등과 조선기독교청년회(YMCA)를 중심으로 후진을 양성하다가 12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4년 《한국태평양》지를 발간하였고, 19년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국무총리로 추대되었다. 임시정부의 직제를 대통령제로 바꾸고 20년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21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돌아오지 않자 의정원의 불신임을 받았다. 그 뒤 워싱턴·하와이 등지에서 항일외교활동을 벌이다가 광복 후 귀국, 독립촉성중앙위원회 총재, 민족통일총본부 총재 등을 지내며 반공·반탁을 주장하였다. 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이어 초대 국회의장·대통령이 되었다. 6·25 때 정부가 부산에 피란해 있던 51년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자유당을 창당, 이듬해 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54년 초대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조항(重任制限條項) 철폐를 골자로 한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으로 대통령에 3선되었고, 60년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로 하야, 하와이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죽었다.

 

윤보선(尹潽善) 1897년 8월 26일 출생 (*사망) 전 대통령, 전 국회의원 전 대한민국 대통령 제4대

 

호 해위(海葦). 충남 아산(牙山) 출생. 영국 에든버러대학을 졸업하고, 8·15광복과 더불어 정계에 투신,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에 취임하였다. 이어 한영(韓英)협회장·민중일보사 사장 등을 지내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서울시장에 발탁되었으며, 1949년 상공부장관이 되었다. 그 후 대한적십자사 총재·상이군인신생회 회장 등에 추대되었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7년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선임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 1959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붕괴된 후 대통령선거에 민주당후보로 입후보하여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인하여 1962년 사임하고, 1963년 민정당(民政黨)을 창당하여 그 해 대통령선거에 대통령후보로 출마, 박정희와 겨루었으나 실패하고,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5년 민중당(民衆黨)을 창당하고, 1966년 신한당(新韓黨)을 창당하여 총재에 취임하였는데, 4자회담을 거쳐 신한당과 민중당을 통합,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에 출마, 박정희에게 또 패배하였다. 1970년 국민당(國民黨) 총재에 취임하고, 1979년 신민당 총재 상임고문에 추대되었다. 

 

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 출생 (*사망) 전 대통령, 전 군인 전 대한민국 대통령 제5.6.7.8.9대

 

경북 선산(善山) 출생. 가난한 농부인 박성빈(朴成彬)과 백남의(白南義) 사이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만주의 신경(新京:現 長春)군관학교를 거쳐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8·15광복 이전까지 주로 관동군에 배속되어 중위로 복무하였다.

 

광복 이후 귀국하여 국군 창설에 참여하였으며,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제2기로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하였다. 그 후 육군포병학교장, 제5사단장, 제7사단장, 제1군 참모장, 제6관구 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제2군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1949년 사상 관련사건에 연루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된 적도 있었다. 당시 신문보도에 의하면 여수·순천사건 관련공산주의 혐의자로 되어 있는데,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구명운동에 의해 복역은 면제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을 주도하고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으며 1962년 대통령권한대행을 역임,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이어 민주공화당 총재에 추대되었고, 그 해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1967년 재선된 후 장기집권을 위하여 1969년 3선개헌을 통과시켰다. 제3공화국 재임동안 '한·일국교정상화'와 '월남파병문제'를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였다. 1972년 국회 및 정당해산을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유신정권인 제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유신시대 초기에는 새마을운동의 전국민적 전개로 농어촌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였고, 제5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완성으로 국민들의 절대적 빈곤을 해결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하였다. 그러나 상대적 빈곤의 심화와 장기집권에 따른 부작용, 국민들의 반유신 민주화운동으로 그에 대한 지지도가 약화되자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정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지식인·학생·종교인이 중심이 된 민주화운동과 경제개발에서 소외된 노동자·농민의 생존권확보운동은 더욱 드세졌다.

 

이러한 가운데서 내치(內治)의 어려움을 통일문제로 돌파하고자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민족통일의 3대원칙으로 규정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과 1973년 6·23선언이라 불리는 '평화통일외교정책'(할슈타인원칙의 폐기)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의 획기성에도 불구하고 실제 정책면에서는 북한의 비협조와 당시의 국제정세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74년 8월에는 영부인 육영수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문세광(文世光)에게 저격당해 사망하였다. 이러한 정권의 위기는 결국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을 야기시켰으며,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의 저격으로 급서(急逝)하였다.

 

최규하(崔圭夏) 1919년 7월 16일 출생 전 대통령, 전 사회기관단체인 전 대한민국 대통령 제10대

 

호 현석(玄石). 자 서옥(瑞玉). 강원 원주(原州) 출생. 1941년 일본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43년 만주 국립대동학원(國立大同學院)을 졸업하였다. 1945년 서울대학 사범대학 교수에 취임하였다가 19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옮기면서 농림행정에 종사, 1951년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서리를 거쳐 외무부 통상국장이 되면서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52년 주일대표부 총영사, 1959년 주일대표부 공사로 승진, 그 해 외무부차관이 되었고,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외교담당 고문이 되었으며, 1964년 말레이시아 대사, 1967년 외무부장관에 발탁되었다.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취임,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이 되어 평양에 다녀왔다. 1975년 국무총리에 기용되고, 1979년 10·26사건 이후 대통령권한대행을 거쳐, 그 해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80년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1981년 4월부터 국정자문회의 의장으로 활약하였다.

 

1991년 이후부터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을 지내고 있다. 1970년 한국외국어대학으로부터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국제회의 참석만도 1967년 제22차 유엔총회 수석대표를 비롯하여 30여 회에 이른다. 그 밖에 서훈(敍勳)으로는 1970년 일등수교훈장, 1971년 수교훈장 광화대장, 1979년 무궁화대훈장, 198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 국내훈장과 타이정부로부터 받은 백상최고훈장 기사대장 등 10여 종의 외국훈장을 받았다.

 

박충훈(朴忠勳) 1919년 1월 19일 출생 (*사망) 전 연구기관단체인, 전 정무직공무원, 전 경제기관단체인 전 대통령 권한대행, 전 경제기획원 장관 부총리 겸임(제3대), 전 상공부 장관 제18,22대

 

전두환(全斗煥) 1931년 1월 18일 출생 전 대통령, 전 군인 전 대한민국 대통령 제11.12대

 

경남 합천 출생. 1951년 대구공고를 졸업하고,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박정희에게 발탁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1969년 육군본부 수석부관을 지냈다. 1970년 백마부대 제29연대장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고, 1971년 제1공수특전단 단장을 지냈다.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8년 제1사단장을 지낸 후 1979년 초 국군보안사령관이 되었다. 그 해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자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고,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80년 중장으로 진급하고, 이어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되었다.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함께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그 해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이어 8월 5일 대장으로 진급하고, 22일 예편하였으며,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으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어 2월 개정된 새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재임기간 중 물가안정, 서울올림픽 유치, 무역흑자 등을 이루었으나,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고, 대통령 단임제를 실천하였다. 퇴임 후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문제로 책임추궁을 당하다가 1988년 11월부터 1990년 말까지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1996년 12·12 및 5·18사건, 비자금사건과 관련하여 사법처리되었다.

 

노태우(盧泰愚) 1932년 12월 4일 출생 전 대통령, 전 군인 전 대한민국 대통령 제13대

 

대구 달성() 출생. 1955년 육군사관학교, 1968년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으며, 1974년 준장으로 진급하여 공수특전여단장과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등을 역임하였다. 1979년 ‘12·12사태’에 가담하여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민주정치세력 진압 등 신군부세력의 정권획득을 위한 일련의 과정에 참여하였다. 1980년 중장으로 진급, 국군보안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81년 대장으로 예편한 후 외교안보담당 정무제2장관, 1982년 체육부장관을 거쳐 내무부 장관, 1983년 서울올림픽대회 및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정의당(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정당 대표위원에 임명되었다. 1987년 6월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6·29선언’을 발표, 정국()을 대화합의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8월 민정당의 제2대 총재, 12월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88년 제6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0년 2월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과 함께 3당을 합당하여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킴으로써 4당체제에서 양당체제로 정계를 개편하였다. 그 해 6월과 이듬해 4월에 러시아 대통령 M.고르바초프와의 정상회담으로 한·러 국교회복에 새 전기를 마련하고, 중국과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북방외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95년에는 재임기간 중에 비자금을 모금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검찰에 구속, 재판을 받는 등 대통령 재직시의 사건으로 불명예스러운 일을 겪었다. 무궁화대훈장, 보국훈장 국선장(), 을지무공훈장 등을 받았으며, 저서에 《위대한 보통 사람들의 시대》가 있다.

 

김영삼(金泳三) 1927년 12월 20일 출생 전 대통령, 전 국회의원 전 대한민국 대통령 제14대

 

경남 거제() 출생. 1952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무총리 장택상()의 비서가 되었다. 1954년 26세의 최연소자로 3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5·6·7·8 ·9·10·13·14대 의원에 당선됨으로써 9선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 사이 민주당 대변인 2번, 민중당 등 야당 원내총무 5번을 역임하고 1974·1979년의 신민당과 1987년의 통일민주당 등 야당총재를 3번 지냈다.

1980년 이후
전두환() 정부에 의해 2년 동안 가택연금되어 정치활동을 못 하였고, 1983년 5월 18일~6월 9일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전개, 5공화국하에서의 민주화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1985년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직을 맡았고, 신민당 창당을 주도하여 신한당을 와해시켰다.

 

]1987년 통일민주당을 창당, 총재가 되고 그해 12월 1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9년 6월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한국 정치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하였다. 1990년 민주정의당 총재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과 통합, 민주자유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92년 12월
14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 1993년 2월 취임함으로써 32년간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종식시키고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1994년 마틴루터킹센터가 수여하는 세계적인 인권운동 평화상인 비폭력평화상을 받았으며 1995년 뉴욕에서 열린 국제연합 50주년 기념총회에서 연설하였다.

 

김대중(金大中) 1926년 1월 6일 출생 전 대통령, 전 정치인, 전 국회의원 전 대한민국 대통령 제15대

 

1925년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출생하였다. 1963년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50년 《목포일보》 사장이 되었고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된 후 1971년까지 6·7·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1963~1967년 민주당·민중당·신민당 대변인, 1968년 신민당 정무위원을 역임하였고, 1971년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민주공화당박정희()와 겨루었으나 패배하였다. 그 후 미국·일본 등지에서 반체제운동을 주도하다가 1973년 8월 8일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하여 국내로 납치(김대중납치사건)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76~1978년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80년 초 정치활동을 재개하였으나, 같은 해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5년 귀국하여 김영삼()과 더불어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역임하였고 1987년 8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하였다.

같은 해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되었고 1991년 9월 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하여 공동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다시 낙선하여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1993년 영국으로 건너가 1년 동안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연구생활을 하였고 1994년 귀국,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민주당의 최대 계파인 동교동계의 막후인물로서 여전히 제1야당의 실력자로 알려졌다. 1995년 6월에 실시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적극 참여하여 민주당을 승리로 이끌고, 같은 해 7월 정계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계파 국회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총재가 됨으로써 제1야당의 총수로 정치생활을 재개하였다. 1997년 10월 자유민주연합과의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끌어낸 뒤 같은 해 12월 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룩하였으며,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8년 12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중국 및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갖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다.

1999년 5월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으며, 6월에는
미국 경제 주간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하는 '아시아개혁을 주도하는 지도자 50인'에 선정되었다. 2000년 1월 자유민주연합과의 내각제 개헌논의를 유보하고, 새천년민주당을 출범시켜 초대 총재에 취임하였다.

2000년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대로 평양을 방문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또한 50여 년 간 지속되어 온 한반도 냉전과정에서 상호 불신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에의 새로운 장을 여는 데 크게 기여한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노무현(盧武鉉) 1946년 8월 6일 출생 현 대통령, 전 변호사 현 대한민국 대통령 제16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경남 김해의 시골 농가에서 태어나 1966년 부산상고를 졸업했다. 1975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전지법 판사를 지내다 1978년부터 변호사로 활동했다. 1981년 시국 사건의 변호를 맡기 시작하면서 인권변호사로 변신해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민주화의 한길을 걸었다. 1988년부터는 정치에 참여해 원칙과 소신을 지키며 정치변화를 선도했다. 제13, 15대 국회의원과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했고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이 과정에서 지역주의의 장벽에 막혀 네 번이나 낙선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현실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2002년 최초의 국민경선제에 의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그 해 12월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지지로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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