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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읽어야 할 칼럼

[스크랩] 노무현은 왜,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나?

새벽이슬1 2007. 1. 30. 23:26
노무현은 왜,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나?
[연재] 김정일의 인질이 된 대한민국(24)



▲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민주당 후보
I
2003년 10월 10일, 노무현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재신임을 묻겠다고 발언했다. 이로 인해 한국사회는 크게 술렁이고 있다. 봄에 노동자들의 집단파업 등 연이은 집단행동에 접하면서 “대통령 못해 먹겠다”고 솔직하게 술회한 적이 있었지만, 그런 사태가 국민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찾아왔다.

이제 집권 8개월 만에 노무현 참여정부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그렇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시각과 정파적 입장에서 좋은 분석이 나와 있지만, 정작 그가 왜, 어떻게 해서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등장하여 당선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석하는 글들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노무현 참여정부가 대단히 어려운 지경에 빠질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진단은 이미 대선과정에서 언론, 정계, 지식계층에서 심각하게 거론되었다는 점이다.

II
노무현이 대선후보로 등장하게 되는 국내외적 여러 배경과 남북관계의 변수를 고려한다면, 그의 당선이 미칠 후유증과 정치적 리더십의 위기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우선 노무현의 민주당 대통령후보로의 선출이 의미하는 것은 야당인 한나라당에게 절대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정권을 내줄 수 없다는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당의 정략적 차원의 긴박한 선택이었는 점이다.

특히 김대중 개인으로서는 평양의 김정일에게 2000년 6월 정상회담 직전에 비밀리에 5억 달러를 송금하였으므로, 만약 이것이 탄로날 경우, 야당이 집권했을 시에 전두환, 노태우에 이어서 법정에 선 뒤 교도소에 가야 하는 세 번째 비운의 대통령이 될 각오를 해야 할 판이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각종 국제민권상을 탄 김대중으로서는 죽음보다도 더한 치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김대중의 후계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여러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했다.

첫째로, 김대중의 최우선 고려사항은 자신의 대북유화, 햇볕정책의 계승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점이다. 북한에 일방적으로 ‘퍼주기식’ 유화정책이라든가, 북한 인권을 외면한 공산독재의 수명을 연장하는 이적(利敵)행위를 하는 어리석은 정책이라는 국내외의 따가운 여론의 화살을 맞으면서도 자신처럼 외골수적 신념으로 햇볕정책을 충실히 계승할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아마도 김대중은 민주당 내에서 여러 정치인들을 비밀리에 인터뷰하여 의향을 타진하고 성분조사에 착수한 바, 햇볕정책의 발전적 계승을 약속하겠다는 노무현의 다짐을 받아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둘째로, 가장 당선 가능성이 많은 인물이어야 했다. 그러자면 서울을 제외하고 유권자가 가장 많은 경상도에서 일정한 표를 확보해야 한다. 서울과 충청권의 이회창 후보의 지지도를 잠식시키기 위해서는 경상도 선거구민의 지역감정을 이용해야 한다는 정략적 선택이었다. 지난번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등 3파전 선거에서 경상도에서 이인제 지지표가 상대적으로 이회창의 지지표를 잠식함으로써 김대중의 당선에 일등 공신 역할을 한 기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지역감정의 단 맛을 향유한 집권당 민주당은 어떻게 해서든지, 경상도 표를 잠식해야 했다. 그것을 위한 최선의 방책은 경상도 출신 인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노무현 이외에 다른 마땅한 인물을 찾을 수 없었다.

셋째로, 노무현의 최고 학벌이 부산상고 졸업이라는 것이 김대중의 목포상고 졸업이라는 것과 일맥상통하여 평생동안 학벌에 대한 심각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아온 김대중으로서는 자존심을 만족시킬 수 있다. 자신의 후계자로서 너무 지식이 많거나 너무 똑똑해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 아닐까?

요약한다면, 김대중으로서는 노무현이 노동자단체에 파고들어 그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정치적 노력을 했었던 경력에서나, 그의 장인(권오석) 어른의 50년대 한국전쟁 당시 맹렬히 활동한 좌익 경력에서 보거나,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걸어온 역경이 너무나 유사한 노무현을 가장 자신의 정책을 무리 없이 계승할 인물로 선택했다고 보아야 한다.

민주당은 선거 1년 전부터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여론 조사를 통해 경상도 출신의 후보 선출이 유권자들에게 파고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이런 김대중의 치밀한 계산과 당내의 마땅한 차기 리더십의 부재, 이와 함께 새로운 국민경선제의 운영으로 노무현 후보는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민주당은 오랫동안 김대중이라는 카리스마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보이는 가운데 차기 지도자군을 제대로 양성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후보경합이 치열했으며, 결국 국민경선제라는 제도를 도입하여, 평당원들의 참여의 폭을 넓히는 듯 국민들의 관심을 끌면서, 외면적으로 언론과 국민들의 주목을 받아서 보수적이고 노쇠하게 보이는 한나라당에 비해 참신한 당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와 함께 여러 외부적 여건이 노무현의 당선을 도와주었던 것은 그에게는 정치적 행운을 안겨주었다.

III
노무현은 5공청문회에서 일약 정치스타로 발돋움하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증언석에 둔 광주사태에 관한 질문에서 의분을 참지 못해서 명패를 집어던지는 행동을 연출했지만, 변호사 출신답게 조리 있게 질문하여 생방송을 지켜보던 국민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는 김영삼이 3당 합당에 가담했을 때, 이에 합류를 거절하고 김대중의 정파에 가담하면서 대의명분에 강한 자신의 면모를 과시했으나, 그 이후 경상도 지방에서는 변절자라고 하여 시장선거에서 낙방하는 등 어려운 시절을 경험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노무현은 워낙 럭비공처럼 튀는 성격의 소유자이고, 대통령직에 대한 준비의 미비와 경륜의 부족, 국제정세의 무지 등의 문제점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노출되자, 보수언론의 집중타를 맞았고, 그의 인기가 폭락하면서 당선가능성이 점차 희박해졌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월드컵 열기와 월드컵의 4강 신화를 만든 미남 정치인 정몽준의 대선 출마선언으로 젊은 유권자들의 표가 더욱 분산될 여지가 커졌다. 그러나 그는 집념의 승부사였다.

그는 정몽준과의 후보단일화 추진을 통해 회생의 시간을 벌게 되고 젊게 보이는 화장술(化粧術)과 국회청문회와 변호사시절에 갈고 다듬었던 구수한 언변(言辯)으로 교묘히 유권자에게 어필하게 되었다. 방송매체도 그의 우군이 되었다. 처음부터 적극 지지를 표명한 MBC와 그동안 중립을 지키던 KBS가 가을부터 적극적으로 그를 홍보, 지원하게 되었고, 정몽준-노무현의 토론과 연이은 단일화 과정을 한나라당의 불공정 방송이라는 아우성 속에 생방송으로 중계되면서 노-정 양자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노사모, 시민단체, 호남지역의 지식인들, 영화예술인들 등을 중심으로 한 외곽부대들이 노무현 후보의 개혁지지 성향을 홍보하고 이미지 개선에 열을 올렸다. 특히 이들은 노무현 후보가 부산, 경상도 지역감정으로 인해 얻은 개인적 손실을 각오하고 민주당에 입당하여 선거에서 많은 불이익을 감수했던 사실을 유권자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리하여 노무현은 ‘의리의 경상도 사나이’의 상징이 되었다.

한국은 월드컵대회를 유치하여 한국축구가 4강에 진출하는 선전을 하면서, 민족주의 정서가 과잉으로 분출하게 되었다. 악마군단에 의해 수십만명이 축구응원을 위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한국축구는 폴란드, 포르투갈, 미국 등을 차례로 이기고 나서 서독과 4강을 겨루었다. 전세계가 한국축구의 선전(善戰)에 놀랐다. “WE CAN DO EVERYTHING”이라는 정신이 한국사회에 확산되었다. 월드컵 열기는 한국사회에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서는 분위기를 주도하였다. 월드컵에서 거둔 4강의 성적은 국민들에게 냉철한 판단력이 마비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세계축구 4강이 되니까 국력 4강으로 착각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신용카드로 빚 걱정하지 않고 마구 마시고 마구 썼다. 한국인들은 이제 축구를 이겼듯이, 미국도 일본도, 중국도, 러시아도 무서울 것이 없어 보였다. 통일도 “우리 힘으로, 또 자주적으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중남미 국가들이 밤낮으로 축구를 하면서 축구로 세계를 제패했지만, 정치적,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항상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을 깡그리 잊은 것이다.

여기에 6월 미군 장갑차에 의해 여중생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자 주한미군은 미군 장갑차 운전병을 무죄로 판결, 졸속 처리하는 실책을 범하였고, 이것을 계기로 하여 반미운동이 촛불 시위하는 형태로서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노무현은 이런 반미 분위기에 교묘하게 편승하였다. 반미 촛불 시위에 참가한 젊은이들은 해외여행의 견문이 부족한 노무현이 봄에 기자회견에서 “백악관에 사진 찍으러 가지는 않겠다”고 한 발언을 긍정적으로 이해했으며, 그의 불확실한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을 대범하게 포용하였고, 오히려 미국을 방문하여 워싱턴의 정계에 자신의 입장을 밝힌 이회창 후보와 비교하여 노무현을 훨씬 자주적이고 주체적 인물로 인식하였다.

이런 반미 분위기 속에서 10월 김대중 정부는 부산아시안게임에 북한팀을 초청했고, 김정일은 평양미녀응원단을 부산에 파견함으로써 화답했다. 평양의 미녀들은 일사분란하게 응원하였고, 언론도 북한여성응원단들에 취재의 촛점을 맞추어서 ‘평양미녀’ ’남남북녀’라는 둥 친북 분위기의 편성에 한껏 열을 올림으로써, 민족공조와 민족화해의 분위기에 일조하였다. 한때, 재일동포의 북송선의 역할을 하여 재일동포의 한(限)이 서린 북한의 만경봉호는 밤이 되면 부산시민들의 볼꺼리가 되었다. 이러한 남북화해무드는 국민들에게 통일과 남북화해에 주한미군이 통일의 걸림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기여했다.

IV
이렇게 대내외 여건이 노무현의 당선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지만, 정치인 노무현 자신의 자질도 대선의 역전에 기여했다. 무엇보다도 노무현은 김영삼과 김대중의 정치후배이자 정치생도로서 그들을 지근(至近) 거리에서 모시면서, 그들의 감각적 정치기술을 배워나갔다. 그는 점차 밑바닥 민심에 대한 동물적 본능과 같은 직감력을 소유한 승부사적 기질의 정치가로 성장하였다.

한 표라도 아쉬운 노무현은 선거운동 시절 표가 있는 곳이면 교도소를 제외하고, 전국 어디든지 찾아 나섰을 것이고, 보통사람들이 만나기 기피하는 인물도 만났을 것이고 그들에게 들어줄 수 없는 약속도 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한총련 인사들을 청화대로 초청했겠나? 지킬 수 없는 약속과 만나서는 안 된 사람들을 표를 구걸하기 위해 만났다면 그 부작용이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노무현 대통령은 존 케네디(John F. Kennedy)의 암살의 비극을 반추할 필요가 있다. 존 케네디가 닉슨(Richard M. Nixon)과의 대선과정에서 시카고 마피아의 조직과 자금의 지원을 받았다. 그런데 3년 뒤 재선을 앞두고, “마피아와 관계를 끊으라”는 당시 법부장관인 동생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그들과 관계를 갑자기 단절했다. 마피아는 케네디를 배신자라고 간주했다. 결국 존 케네디는 암살되었고, 그의 암살에 대한 마피아 개입의 소문이 돌았었다. 이런 것에 대한 교훈을 타산지석으로 삼았어야 마땅하다.

노무현의 당선 가능성에 대해서 김대중과 민주당 고위층이 간과한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대통령의 자질로서의 노무현에 대한 검증을 게을리 한 것이다. 그의 사상, 인품, 경력, 출신성분, 학력, 여행 및 국제정세에 대한 견문, 국가전략에 대한 비전 등 모든 것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때, 아직 정치가 노무현은 대통령직을 감당할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덜 익은 과일은 먹는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는 법이다. 분명히 국회의원 수준의 인물이 있고, 대통령 수준의 인물이 있다.

닉슨은 케네디와 경선에서 패배한 후, 세계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전세계의 주요 국가들을 사적으로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닉슨은 차기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세계정세에 관한 폭넓은 견문지식과 각국의 주요 정치인들과의 교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그런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강대국 미국의 진정한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V
김대중과 민주당 지도부는 무조건 당선시키고 보자는 식의 당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노무현의 능력을 종합적으로 신중하게 검토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한때 민주당 내에서도 노무현후보로는 이기기가 곤란하다고 하여 노 후보의 퇴진을 요구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가 마땅한 인물이 없고 시간도 촉박하다는 이유로 유야무야된 적이 있었다.

대선전에 민주당 일부 원로 정치인들은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시키기’보다도 노무현의 ‘대통령다운 대통령 만들기’에 대해 사석에서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던 적이 있었다. 이렇게 노무현의 후보선택은 처음부터 집권당 민주당과 김대중 대통령이, 국가적 차원의 전략적 선택이었다기보다는 ‘당파적 차원의 정략적 선택’이었다는 것이 불행의 씨앗이었다. 그러기에 그 대가를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이 치르고 있다고 보면 된다.

더 큰 문제는 이제 노무현의 국민투표를 통한 재신임 여부 논의가 국가적 손실과 불행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국민투표 논의에 대한 엄청난 시간의 낭비, 선거의 재정적 낭비는 물론, 부동산 폭등 및 경제위기, 이라크 파병과 한미관계, 북핵문제 등 국가현안 사업이 상당기간 표류될 위기에 처해졌다.

노 대통령이 거창하게 재시한 ‘동북아 중심국가’의 화두는 이미 물 건너가고 말았다. 한국의 과거 정치사는 정치집권층이 ‘정권안보를 국가안보보다 앞서서 추진한 과오를 되풀이했던’ 무수한 정치적 사례들로 점철되어 있다. 희망에 차야할 21세기 초에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하고 있는 현장에 살고 있다는 것은 한국인들로서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2003년 10월 16일)


ㅁ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 뉴라이트전국연합 공동대표)
2007년 01월25일 04:34분 04초  
이주천 교수의 전체기사  
출처 : 우리는 하나다. 하나가 되자!.
글쓴이 : 잠깬사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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