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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사망 200주년 워털루에 가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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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사망 200주년 워털루에 가다.

새벽이슬1 2021. 9. 3. 22:35

세계사의 결정적 戰場, 워털루 들판에서-나폴레옹은 누구에게 졌나? (上)
나폴레옹 사망 200주년, 워털루에 가다

: 神이 자신에 도전한 나폴레옹의 포병을 비로써 응징했다?

: 프랑스 사람들은 나폴레옹이 웰링턴에 진 것이 아니고 프로이센군에 졌다고 강변

: 그날 나폴레옹은 치질과 고열에 시달렸다

: 마지막에 투입한 황제근위대의 후퇴로 무너지다

: 206년 전 신음과 비명으로 뒤덮였던 그 들판은 지금도 잡초만 무성하다

 



사자의 언덕, 브뤼셀 남쪽 워털루 전장에 평화를 기원하며 세운 기념물 나폴레옹 사망 200주년, 워털루에 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황제의 사망 200주년 석 달 뒤인 지난 8월 초, 나는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우버 택시를 타고 남쪽 워털루 마을로 향했다. 약 30분 걸렸다. 운임은 30유로. 워털루 결전장은 1815년 6월18일 오전처럼 간밤에 내린 비로 젖어 있었다. 2004년 봄에도 여길 온 적이 있어 기념관에 들르기 전에 전장(戰場)이었던 들판을 먼저 걸어보았다. 206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전원풍경, 잡초가 무성한 평지이다. 그날처럼 땅이 질퍽거렸다. 그날 나폴레옹은 대포를 제대로 운용할 수 있도록 땅이 굳기를 기다리느라 세 시간 이상 개전(開戰)을 미뤘고 이게 치명적이었다.

연합군 총사령관 웰링턴 영국군 장군(공작, 이름은 아서 웰즐리)이 현장 지휘소를 설치했던 곳엔 ‘사자의 언덕’이란 기념물이 있다. 226개 계단을 40m쯤 기어 올라가면 사자상이 있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펼쳐진 전투현장이 내려다보인다. 웰링턴이 선점한 북쪽이 약간 높다. 남쪽에 포진한 나폴레옹은 그날 줄곧 완만한 비탈을 올라가면서 공격하였다. 이것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정치나 전쟁에선 상대가 선택한 무대나 조건에서 싸우는 건 늘 위험하다. 유럽 역사가 바뀐 그날 아침 나폴레옹은, 한 번도 웰링턴과 싸운 적이 없었는데도 그를 깔보는 논평을 하곤 했다.

사자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전장은 3X3km쯤 되어 보였다. 여기에 쌍방 약 20만 명의 병력이 뒤엉켜 아홉 시간 동안 대포, 소총, 칼, 창, 기병돌격, 백병전, 포격전으로 격돌했다. 전투가 끝났을 때는 늦은 밤이었고, 이 좁은 땅에 약 5만 명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쓰러져 있었다. 신음, 비명, 확인사살, 확인자살(刺殺) 속에서 동맹군 소속 군인들과 근처 주민들이 몰려와 전사자와 부상자들의 소지품을 빼앗거나 훔쳤다. 특히 전사자들의 이를 뽑아가 치과에 판 이들이 많았다.

워털루 전투 기념관에는 이긴 웰링턴보다 진 나폴레옹이 더 부각되어 있다. 이 부근이 프랑스어권이고 당시 벨기에가 프랑스 지배하에 있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다소 편향적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은 웰링턴에게 지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운이 나빴고, 오후에 웰링턴 군대와 합류한 프러시아군의 블뤼헤 장군 때문에 졌다는 식으로 설명하곤 한다. 거의 1000년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영국의 라이벌 의식이 워털루에 투영되고 있다. 특히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유고의 ‘레미제라블’이 워털루 전투를 자세히 묘사하면서 나폴레옹의 불운을 적극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면서 변호했다. 유고는 신(神)이 나폴레옹을 질투하여 불운의 덫을 놓았다고 했다.


한국의 나폴레옹 팬 박정희

‘웰링턴 때문에 졌을까, 블뤼헤 때문에 졌을까, 아니다 그가 신을 건드렸으니 이길 수 있었겠는가.’

신의 질투가 나폴레옹의 신기(神器)인 포병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이다. 전날 밤 비를 쏟게 하여 땅을 진창으로 만드는 식으로. 워털루 기념관의 짤막한 3D 영화보다는 파노라마 관에서 본 길이 110m 기록화가 압권이다. 이 그림도 진 나폴레옹 군대 중심이다. 그날 전투는 나폴레옹군의 포병 일제사격, 보병돌격, 기병돌격, 황제 근위대의 최후돌격 순으로 진행되어 공세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그림은 워털루 100주년을 맞아 프랑스 화가가 그린 것이다. 그림의 주제는 프랑스 기병돌격이다. 실패로 끝난 돌격을 지나치게 미화한 것은, 소설적 비장미(悲壯美)는 몰라도 정확한 역사기록은 아디다. 기념관 서점도 나폴레옹 관련 책이 많았다. 나폴레옹 이미지는 여러 상품의 브랜드로 활용되는데, 이 서점에서 산 책을 읽어보니 한 한국 기업인은 그의 유명한 모자를 100만 달러 이상을 주고 매입, 회사에 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티픈 클라크라는 저술가가 쓴 책을 샀는데 제목이 ‘프랑스는 어떻게 워털루에서 이겼나(혹은 그렇게 생각하는가)’였다. 프랑스인들이 영국을 질투, 나폴레옹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 요설(饒說)을 구사한다는 비판서이다.

한국의 가장 유명한 나폴레옹 팬은 박정희일 것이다. 그는 보통학교 다닐 때 이순신과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병정놀이를 하면서 군인이 되고 싶어 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최후는 이순신과 닮았지만(“난 괜찮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그의 비장한 생애는 나폴레옹의 판박이다. 두 사람은 식민지에서 태어나 종주국 군대에 들어갔고, 포병장교가 되었으며 쿠데타로 집권해 국가의 기틀을 세웠다. 독서인의 교양으로 근대국가 건설을 주도했으며 이혼 경력, 단신(短身), 사후(死後) 재평가도 공통점이다. 두 사람은 군인, 혁명가, 교사, CEO의 자질을 갖추었지만 큰 차이점도 있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더 대왕, 시저, 칭기즈칸급의 군사적 천재로서 16년간 이어진 나폴레옹 전쟁에서 약 300만 명의 죽음을 불렀다. 박정희는 국가건설 과정에서 최악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단기간에 최대의 업적을 남겼다(18년간 수많은 시위에 직면했지만 한 번도 발포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인구 5000만 명 이상의 큰 나라로서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 이상이고, 민주주의를 하는 진정한 강대국은 일곱뿐이다.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

파괴자와 건설자(나폴레옹 법전, 프랑스 은행, 교육제도 특히 교사 양성제도, 기병·포병·보병을 일체화한 국민군 건설)의 양면(兩面)을 지닌 나폴레옹에 비교하면 박정희는 건설자의 면모가 압도적이다.

러시아 원정 실패의 결산이 워털루

1815년 6월18일 워털루 결전은 약 20년간 유럽 대륙을 석권하였던 나폴레옹 군대를 파멸로 몰고 가, 루이 14세 전후부터 약 200년간 패권국가 행세를 하던 프랑스를 내려 앉혔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25년간 진행된 대격동의 시대가 지고 19세기의 새로운 격변이 시작된다.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강대해지기 시작하고(독일 통일로 이어진다), 영국은 라이벌을 제거함으로써 ‘팍스 브리타니카’ 시대를 연다. 영국은 늘 마지막 전투에서 이긴다는 말이 있다. 전광석화의 군사적 천재 나폴레옹에게 이긴 웰링턴은 우직하고 끈질긴 지휘관이었다.

워털루 전투는 그 3년 전 러시아 원정 실패의 결산이었다. 1799년, 프랑스 대혁명 10년 뒤 쿠데타를 일으켜 29세에 집권한 나폴레옹은 1804년에 황제가 되고 그 이듬해 숙적 영국을 치려다가 트라팔가 해전(海戰)에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함대에 의하여 저지된다. 넬슨은 이순신처럼 목숨을 바쳤다. 19세기 영국의 가장 유명한 두 장군 넬슨과 웰링턴은 나폴레옹 덕분에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트라팔가 해전에도 불구하고 1805년은 나폴레옹 최고의 해였다. 그해 12월2일 지금의 체코 브르노 근방 아우스터리츠에서 벌어졌던 이른바 ‘3제(帝)회전’에서 나폴레옹군 7만 5000명은 러시아 알렉산드로 1세와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 프란츠 2세가 이끈 동맹군 8만 5000명을 격파(사상자 2만 7000명), 사실상 유럽 대륙의 패권을 잡게 된다(이 전투로 오스트리아 황제가 겸하던 신성로마제국도 거의 1000년 만에 해체되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나폴레옹의 거의 예술적 지휘로 그의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나폴레옹의 야망은 1808년부터 분수를 넘게 된다. 러시아 알렉산드로 1세와 독일 에르푸트에서 만난 그는 프랑스와 손잡고 영국을 고립시키자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꽁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러시아가 영국에 대한 대륙 봉쇄령을 어긴다는 트집을 잡아 거대한 전투를 구상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바르샤바 공국 등 동맹국 병력까지 동원, 약 60만의 대군을 편성, 1812년 6월24일 러시아로 쳐들어갔다. 병력 수에서 역사상 최대규모였다(정확한 수치이다). 수레가 3만 대, 전마(戰馬) 수십만 마리, 포도주를 2800만 병이나 싣고 갔다. 개전일은 공교롭게도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기습한 날(6월22일)과 비슷한 날짜이고 두 야심가에게 종말의 시작을 연 점에서도 비슷하다.

사라져간 60만 대군

러시아는 약 40만 명을 동원했으나 결전을 피하고 초토화 작전을 펴면서 후퇴, 나폴레옹군의 길어지는 보급선을 게릴라전으로 괴롭혔다. 나폴레옹은 9월 중순 모스크바를 점령했으나 러시아 측이 불을 질러 도시의 90%를 태우니 잘 곳도 먹을 것도 없어졌다(당시 수도는 페테르부르크). 한 달 뒤 나폴레옹은 철수를 결심, 후퇴하는데 겨울이 일찍 닥쳤다. 러시아군은 쿠투조프 장군의 지휘하에 나폴레옹군을 공격, 60만 대군은 러시아 대평원에서 사라져갔다(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이 대목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20만 명이 죽고, 18만 명은 포로, 20만 명이 탈영했다. 겨우 3만 명이 생환하였다. 이런 인적 손실만큼 치명적이었던 것은 수십만 마리의 말을 잃은 점이었다.

나폴레옹의 동원력은 현저히 약화되어 이듬해 라이프치히 회전에서 패배, 1814년 황제 퇴위, 지중해의 엘바섬을 일종의 영지로 받아 물러났다. 유럽을 호령하던 나폴레옹의 그때 나이는 44세, 그는 이 섬에서 쓰레기 처리 시스템까지 만들어주면서 마음을 붙여보려고 했으나 그의 뜨거운 피와 프랑스 상황이 나폴레옹을 마지막 무대로 불러냈다. 루이 18세의 실정과 감군에 따른 제대군인들의 불만, 패전국으로 전락한 프랑스 국민의 상한 자존심을 전해 들은 나폴레옹은 1815년 2월26일 대대 병력의 부하들을 데리고 엘바섬을 탈출, 남불(南佛) 앙티브 근방에 상륙, 투항하는 정부군을 흡수해가면서 3월20일 파리로 들어왔다. ‘괴물탈출’이라고 보도했던 신문은 ‘황제귀환’이란 제목으로 환영했다.

그때 비엔나에서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 질서 재편을 논의중이던 열강은 프랑스 외상(外相) 탈레랑의 제안과 오스트리아 메테르니히의 주도로 나폴레옹을 무법자로 규정, 동맹군을 결성하기로 결정한다.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각기 1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기로 합의했다. 나폴레옹은 이 대군이 집결하기 전에 선제공격을 하여 각개 격파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영국군과 프로이센군 약 20만 명이 벨기에로 집결하는 사이 나폴레옹은, 6월12일 먼저 보낸 약 12만 명의 프랑스군을 따라 벨기에로 들어왔다. 그는 6월16일 워털루 남쪽 두 곳에서 웰링턴의 영국군(주력)과 블뤼헤의 프로이센군을 격파, 흩어버렸으나 치명타를 가하는 데는 실패했다. 패전 후 갈라진 웰링턴과 블뤼헤 부대가 다시 결합하기 전에 우선 웰링턴군을 섬멸한 다음 블뤼헤군을 무찌른다는 나폴레옹의 작전은 성공할 것인가?

206년 전 신음과 비명으로 뒤덮였던 그 들판은 지금도 잡초만 무성하다

세계사의 결정적 戰場, 워털루 들판에서-나폴레옹은 누구에게 졌나?

군의 출현

네이의 연락을 받자 그는 다시 일어나 망원경을 눈에 대었다. 오른쪽으로 약 8km 떨어진 숲속에 정체불명의 부대가 보였다. 참모들은 부대의 복장으로 보아 프러시아 군인 같다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참모는 프랑스 군인 같다고 했다. 잠시 뒤 포로가 된 프로이센 기병장교가 불려왔다.

그는 웰링턴과 합류하기 위해서 달려오고 있는 블뤼헤 장군의 부하 장교라고 자백했다. 문제가 심각해진 것이다. 나폴레옹은 글로시 장군이 퇴각 중인 블뤼헤 장군 부대를 추적 중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그 부대가 나타난 것이다. 나폴레옹은 약 20km 멀리 있는 글로시 장군에게 긴급 지시문을 보낸다.

‘즉시 아군 쪽으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이 명령서를 기병장교가 갖고 달려가는 데 두 시간 이상 걸리고 이 명령서를 수령한 글로시 장군이 워털루까지 온다고 해도 한밤중일 것이다. 나폴레옹은 우선 기병과 보병을 보내 접근중인 프로이센군의 선봉을 요격하도록 조치했다. 이 단계에서 전투를 중단시키거나 후퇴하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이렇게 말했다.

“오늘 아침 우리는 90 대 10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60 대 40으로 유리하다.”

오후 1시30분 네이 원수는 포병에 웰링턴 군대를 향하여 일제 포격을 명령했다. 9~15kg짜리 포탄들이 날아갔다. 양쪽 합해서 14만 군대가 가로 세로 3X3km 정도의 공터에 밀집해 있었다. 밀집대형을 향하여 포탄이 쏟아지니 죽고 다치는 군인들이 많았다. 강철탄을 맞은 군인의 몸이 두 동강 나고, 머리통이 날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웰링턴 군대는 잘 견뎠다. 동맹군은 유럽의 여러 나라 군대로 편성된 혼성군이었는데 영국군이 약 4분의 1이었다. 이들은 스페인에서 단련된 고참이었다. 웰링턴은 영국사병들을 다국적 군대 사이에 끼워 넣어 다른 나라의 신참 군인들을 붙들어놓도록 했다.

프랑스군의 포격은 포탄이 진흙땅에 박혀 불발하는 등 큰 타격을 주진 못했다. 웰링턴은 보병들을 능선 뒤로 일단 물려 포화를 피하도록 했다. 프랑스 포병은 저(低)지대에 있었으므로 능선 뒤의 웰링턴군 동향을 잘 알 수 없었다. 네이는 동맹군이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고 혼란에 빠져 붕괴하고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보병의 정면 공격을 명령했다.


보병 돌격 실패

약 1만 7000명의 보병(步兵)이 대열을 유지하면서 동맹군을 향하여 서서히 진격하는 모습은 장엄했다. 북소리에 맞추어 ‘황제 만세!’를 부르짖으면서 거대한 인간덩어리가 뚜벅뚜벅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양쪽에서는 기병이 따랐다. 엄청난 물체의 관성이 적진(敵陣)을 자연스럽게 돌파할 것 같았다. 여기에 약점이 숨어 있었다. 프랑스 보병은 너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장교들의 명령이 들리지 않았다. 간밤에 온 비로 땅이 질퍽질퍽했다.

많은 보병은 신발이 진흙에 감겨 벗겨졌다. 맨발의 보병이 되었다. 바지에 진흙이 붙어 행군에 지장이 컸다. 밀집대형 한가운데 있는 군인들은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적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태로 적진(敵陣)에 돌입하면 총을 쏠 수 있는 보병은 앞의 3열뿐이었다. 뒷줄 병사들은 덩어리로 엉켜 있어 장전도 발사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밀집대형은 포격의 좋은 표적이었다. 포탄 한 발이 정면의 병사를 타격하면 그 뒤의 스물세 명을 칠 수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 보병이 접근하자 최전방을 지키던 네덜란드-벨기에군은 달아났다. 오후 2시30분쯤 프랑스 보병은 능선까지 올라갔다. 스코틀랜드 보병 3000명이, 능선 뒤에 숨어서 프랑스군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능선을 넘은 프랑스 보병이 50보 거리로 접근했을 때 이들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그들은 능선으로 달려가 다가오는 프랑스 보병들을 향하여 일제 발사했다. 한 발을 발사한 다음 제2탄을 쏘려면 30초가 걸린다. 그 사이 프랑스 보병이 덮치므로 제2탄 발사를 포기하고 총검에 의지하여 돌격, 백병전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두 덩어리의 인간집단이 정면충돌했다. 찌르고 쏘고 비명과 함성과 괴성이 오고 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순간 웰링턴의 부하 욱스브리지 중장이 2600명의 중기병 부대를 투입했다. 그들은 동쪽 비탈을 달려 내려가면서 프랑스 보병을 흩어버리고, 일순의 승리에 도취하여 너무 깊숙이 진격했다가 프랑스 창기병 2400명의 반격을 받았다. 영국 기병대는 지휘관 폰손비 소장 등 1205명과 1303마리의 말을 잃고 물러났다. 이 중기병 돌격은 괴멸적 타격을 입었지만 웰링턴군의 중앙에 집중된 프랑스 보병공격의 기세를 꺾는 데는 성공했다. 프랑스 보병은 적진 돌파에 실패하고 일단 물러나 전열을 재정비하는 데 몇 시간이 걸렸다. 두 군대가 일진일퇴하는 사이에 오후 3시가 지나고 프로이센군이 속속 도착, 동맹군에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전세가 웰링턴에 유리해지고 있었다.


기병 돌격도 실패

오후 4시를 넘은 시각, 네이 원수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고 있던 웰링턴 진영의 중앙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판단하였다. 사실은 부상자를 뒤로 옮기는 것이었는데 후퇴라고 본 것이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네이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기병돌격을 명령한다. 보병 지원 없이 너무 서둔 돌격이었다 67개 중대의 9000명으로 구성된 기병이었다. 돌격이 시작된 직후 이를 지켜보던 나폴레옹은 ‘한 시간이 빠르다’고 중얼거렸으나 멈출 수가 없었다. 영국군 진영의 한 기록자는 이런 글을 남겼다.

< 네 시 경, 우리 앞의 적 포대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거대한 기병의 무리가 나타나더니 진격을 개시하였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영원히 그 장엄한 광경을 잊을 수 없었다. 기병이 다가올수록 바다의 파도가 햇볕을 받은 것처럼 번쩍거렸다.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렸다. 이 엄청난 질량을 저지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유럽 전장에서 용맹을 떨친 그들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을 때 영국군에 명령이 떨어졌다. 기병은 ‘황제만세’를 외치며 돌진하고, 영국 보병은 무릎을 꿇고 총검을 세웠다.>


기병은 비탈길을 질주하지 못했다. 너무 붙어 있어 그런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웰링턴군은 이들에게 집중포격을 가했다. 말과 기수가 무더기로 무너져 벽이 될 지경이었다. 웰링턴군은 대혼란에 빠졌으나 방어진을 만드는 데 성공, 무너지지 않았다. 동맹군은 두 시간 동안 이어진 프랑스의 기병 돌격에 보병·기병·포병 합동작전으로 저항하였다. 빅토르 유고는 ‘레미제라블’에서 기병돌격의 실패를 지형에 돌렸다. 기병이 능선을 넘는 순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구덩이처럼 파진 지형이었고 이 속으로 기병이 쏟아져 들어가버렸다는 것이다. 1970년대에 상영된 영화 ‘워털루’(로드 스타이거 주연)는 이 주장을 따른 것이다. 유고의 이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 약간 파진 지형으로 실패의 원인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황제 근위대의 최후

이날 오후 돌아온 프로이센 군대는 프랑스군의 우익으로 접근, 본격적으로 전투에 가담한다. 워털루 인근 마을을 공격하고 프랑스군이 응전, 수 차례 주인이 바뀐다. 나폴레옹은 아껴둔 근위대에서 4200명을 빼내 이들을 막도록 보냈다. 웰링턴 군대를 제대로 제압하기 전에 프로이센군이 나타나 양면 전투를 강요당했다.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도록 3만 3000명의 병력을 붙여 보냈던 글로시 원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그는 워털루 전투가 시작되어 포성이 들리는데도 프로이센군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글로시 군이 워털루에서 약 10km 떨어져 있어 즉각 추격을 포기하고 워털루로 돌아와 나폴레옹군과 합류했더라면 승패는 달라졌을 것이다. 참모들도 포성이 들리는 워털루로 돌아가자고 건의하였으나 글로시는 이를 거부, 더 멀리 행군했다. 이 바보짓으로 두고두고 비판을 받는다. 나폴레옹도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회고록을 구술하며 글로시를 속죄양으로 삼았다.

오후 5시를 넘어 프랑스 보병은 연합군 정면의 농가를 점령, 포병이 이를 방패 삼아 동맹군의 중앙 방어선을 때릴 수 있도록 했다. 네이 장군은 부관을 나폴레옹에게 보내 증원군을 요청했다.

“증원군? 없어. 내가 만들어내야 한단 말인가.”

웰링턴은 흔들리고 있었다. 중앙이 무너질 위기임을 감지한 것이다. 그는 참모들에게 “밤이 빨리 오든지 블뤼헤가 오든지 해야 할 텐데”라고 중얼거렸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 독백을 인용, 프로이센 원군의 주력이 오지 않았더라면 웰링턴을 끝장낼 수 있었다고 주장, 나폴레옹이 결코 영국군에 진 건 아니라고 강변한다.

오후 7시30분 드디어 나폴레옹은 마지막 카드를 꺼낸다. 예비로 아껴두었던 황제 근위대를 투입하기로 한 것이다. 프로이센군의 주력이 웰링턴군에 속속 합류하고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승부를 내야 한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황제 근위대는 항상 최후에 등장, 무너지는 적군의 심장에 대못을 박아 승부를 결정짓는 역할을 해왔다. 이 정예부대는 한 번도 전투에 진 적이 없었다. 이날은 달랐다. 전세를 굳히는 결정타가 아니라 불리해지는 전세를 회복시키기 위한 마지막 도박에 투입된 것이다. 남은 근위대는 5000명이 안 되었다. 나폴레옹은 이들 앞에 나타나 짧은 연설을 했다.


“결정적 순간이다. 귀관들은 사격하지 말고 총검으로 돌진하여 저들을 쓸어버려라.”

프랑스 포병의 포격 뒤, 근위대는 비탈을 올라갔다. 능선에 접근, 속보로 달려드는 순간, 웰링턴군은 집중포화를 안겼다. 첫 포격에 500명이 쓰러졌다. 보병이 이어서 나타나 근위대를 향하여 20보 앞에서 총검 돌격을 감행했다. 근위대의 뒤편에선 휴고몽 요새를 지키던 동맹군이 나와서 후군을 공격했다.


근위대는 갑자기 진격을 멈추었다. 불패의 근위대가 멈칫하자 ‘졌다’는 패배감이 프랑스 전군(全軍)을 감싸고 순식간에 전염되었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웰링턴 장군이 능선 위에 나타나 모자를 벗어 흔들어 총진격을 명령하였다. 황제 근위대를 비롯, 프랑스군 전체가 등을 돌려 비탈을 내려가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20년간 유럽을 휩쓸었던 나폴레옹군의 총붕괴였다. 프로이센군이 앞장서서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했다. 블뤼헤 사령관은 포로를 살려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살아남은 근위대가 나폴레옹을 호위, 파리로 달아났다. 밤 10시쯤 웰링턴과 블뤼헤가 한 농장에서 만나 승리를 축하하였다. 들판엔 쌍방 약 5만 명의 군인이 시신(屍身)이나 부상자로 변하여 누워 있었다. 이웃 농민들이 밤에 시신을 뒤지면서 물건을 약탈하고 프랑스군 부상자들을 죽였다. 달밤 아래 신음과 비명으로 뒤덮였던 그 들판에 차마 건물을 지을 수 없었는지 지금도 잡초만 무성하다. 웰링턴은 이날 밤 영국으로 보낸 전황 보고서에 ‘워털루 전투’라고 적어 이곳을 불멸(不滅)의 지명으로 만들었다.●(끝)
[ 2021-08-24, 1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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