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자 ! 대한민국!
잘사는 것과 잘 사는것 은 다르다. 본문
![]()
누가복음 11장 14-2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4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6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17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 23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좋은 일꾼이 되는 길이 무엇일까를 묵상해 봅니다. 좋은 일꾼을 말할 때 저는 한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영어 성경의 Approved Workmen Are Not Ashamed(디모데후서 2:15)을 꼽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즉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사람으로 인정된 일꾼’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경말씀은 좀 더 자세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1. 표적 신앙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느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자 무리들이 놀랐습니다(14절).
그때 몇몇 사람이 예수님의 능력을 비하하며 말했습니다.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15절).”
그때 다른 몇몇 사람은 예수님을 시험해서 하늘로부터 오는 화려한 표적(Sign)을 구했던 것입니다(16절). 그들은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낸 예수님의 기적 정도는 하찮게 여겼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증거나 표식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표적 중심적인 믿음은 위험한 것입니다. 외적(外的)인 것만 보고 사람을 우상화하지 말고 먼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영혼의 시력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보이는 표적에 휩쓸리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사탄은 표적으로 예수님을 미혹했습니다. 보지 않고도 진실하게 믿는 것이 훨씬 복됨을 깨닫는 일꾼이 하나님의 좋은 일꾼 입니다.
2. 예수님 편에 확실히 서야 합니다. 23절을 봅시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과 사탄 사이에서 중립적 자리는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사람간의 정치적 주장에서는 절대 선과 절대 악이 없기에 각자가 조금 더 선하고 바르게 여기는 편을 선택합니다. 또한 오늘은 이쪽 편이라도 내일은 저쪽 편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탄 사이에서 선택할 때는 예수님 편에 확실히 서야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편에 확실히 선다는 것이 사탄 편에 선 사람을 무조건 배척하거나 진멸(盡滅)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탄이 진멸의 대상이지 사탄 편에 선 사람이 진멸의 대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탄 세력의 앞잡이와 사탄 세력에 미혹 당해 사로잡힌 영혼은 다릅니다. 사탄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죽기 전에 얼마든지 예수님 편으로 돌아올 수 있기에 극단주의를 버리고 회개하도록 잘 인도해 야할 것입니다.
영어에서 파트(part)는 ‘일부’란 뜻이고 파티(party)란 ‘일부 무리’ 혹은 ‘일부 무리가 모인 것’이란 뜻입니다. 모두가 다 어울릴 수 없기에 일부 뜻이 맞는 사람끼리 어울려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티가 극단화되어 우리 외에 남들은 다 열등하거나 나쁘다고 여기는 것 같은 어원의 파쇼(fascio), 파시스트(fascist), 파티잔(partisan,빨치산)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은 극단주의입니다. 삶의 극단주의는 피하되 구원의 진리 문제에서는 예수님 편에 확실히 서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좋은 친구라고 확신하면 그 친구 편에 확실히 서 주어야 할 것입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둘 다 좋아요.”라고 하는 것은 폭넓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불의도 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친구 편에 확실히 서려고 다른 친구를 어쩔 수 없이 멀리해야 하면 멀리하되 그 멀리하는 친구를 경시하거나 미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시련 중에 남들이 다 떠날 때 찾아와주는 친구는 가까이하고 외면하는 친구는 더 이상 연연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는 과감히 바른 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처럼 예수님 편에 확실히 서야합니다. 좋은 일꾼은 예수님 편에 확실하게 서는 일꾼입니다.
3. 모으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좋은 일꾼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23절). 이 말씀에서 ‘헤친다’는 말은 ‘해를 입힌다(해친다)’는 말이 아니라 ‘흩어놓는다’는 말 입니다.
예수님 앞으로 사람을 모으는 태도가 없는 것은 결국 흩으려는 태도 라는 것입니다
4. 성령 충만을 사모 하여야 합니다 불신자에게 귀신이 쫓겨나간 것은 영구적인 상황이 아니기에 귀신은 언제나 불신자에게 다시 들어올 수 있습니다(24절). 그러므로 일시적으로 귀신이 쫓겨나갔다고 안심하거나 교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깨끗하게 청소된 심령이 성령으로 충만해 있지 않으면 나간 귀신보다 더 악한 일곱 귀신이 들어가 나중 형편이 이전 형편보다 더 나빠질 수 있습니다(26절). 성도는 나쁜 것을 비우는 것도 잘해야 하지만 좋은 것을 채우는 것은 더 잘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빈 곳에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채워지게 마련입니다.
권력도 좋은 권력이 무책임하게 자리를 내놓으면 나쁜 권력이 그 자리를 차지해 나쁜 일을 벌이고 맙니다. 그러므로 좋은 리더가 권력을 얻도록 다니엘처럼 기도하고 성도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늘 깨어 경성해서 좋은 것을 영혼과 교회 안에 채우십시오. 영혼을 깨끗하게 비워 놓고만 있으면 나쁜 힘이 들어와 지배하기 쉽습니다. 가만히 넋 놓고 있지만 말고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악과 싸우고 선을 채워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령 충만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다만 은사가 나타나고 병을 고치는 것을 다 성령 충만의 표식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24절을 보면 말세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성도들을 미혹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세가 가까워질수록 표적과 기사를 선전하고 과시하는 것을 지극히 주의하고 이단을 잘 분별해 내도록 성령 충만의 증거를 표적과 기사에 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참된 성령충만은 힘써 복음을 전하면서 고난에 위축되지 않고 감사가 넘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가는 곳마다 화해의 역사를 일으키고 분위기도 밝게 만듭니다. 또한 교회와 성도들에게 기쁨을 주려고 소리 없이 헌신하기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며 심지어는 불신자도 아름답게 보는 것입니다.
잘사는 것과 잘 사는 것은 다릅니다. 돈이 많으면 잘사는 것이지만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면 잘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잘 사는 삶을 사십시다. |
\
'시·감동·좋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리(梧里)이원익 같은 정승은 없는가 ? (0) | 2021.03.24 |
---|---|
아내가 제발 나가 놀아라 한다! (0) | 2021.03.24 |
트롯이 흐르던 목요일 밤 /미나리 이야기 (0) | 2021.03.15 |
이 집의 비밀은? (0) | 2021.03.14 |
여류 시인 이국화의 근작 수필 (0) | 2021.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