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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값 올려준 문재인과 민주당에 고맙지 않냐?는 썩은 인간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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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값 올려준 문재인과 민주당에 고맙지 않냐?는 썩은 인간들~

새벽이슬1 2021. 3. 6. 19:52

 



당신 집값 올려준 문재인과 민주당이 고맙지 않냐’는 썩은 인간들

 

塵人 조은산

 

돈의 정치

내 인생 최고의 투자는 문재인 정권 하에 완성됐다. 내가 한 것은 딱히 없다. 그저 운 좋게 문 정권 이전에 유주택자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 단지 그 하나다.

 

하찮은 월급쟁이가 벌어봐야 얼마나 벌고 모아봐야 얼마나 모으겠는가. 나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던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어느샌가 나타난 그들이 흘러넘칠 정도의 물을 쏟아부어주고 있다. 나는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는데. 내가 감사해야 하나?

 

지난 총선 때의 일이다. 우스운 얘기지만, 길게 줄을 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이미 오를 대로 오른 집값이지만, 만일 민주당이 다수 여당이 된다면 집값은 더 오를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내 집값 올려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보수정권에 집을 사서 진보정권에 판다는 말은 이미 부동산 시장의 정설로 통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집값 생각해서 민주당을 찍기엔 내 한 표가 너무나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주당은 압승을 거뒀다. 당연히 집값은 대폭등했다.

 

이런 내가 배은망덕하게도 문재인 정권에 반기를 들고 비판의 글을 쏟아내는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나의 자산 가치 상승을 톡톡히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값 상승을 그다지 반기는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전 지역의 집값이 폭등하게 된 상황에, 집값 올라봐야 사실상 헛일이다. 그리고 진부한 얘기지만, 나는 내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될 뿐이다. 부동산 양극화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단순히 내 집 값이 올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위안 삼으며 좌시하기엔, 그 병폐는 내 아이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알량한 양심이 아닌 절절한 부심으로 내다본다.

 

그러나 더욱 슬픈 현실은, 모두가 나와 같은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알고 있는가? 나는 이미 정치 세력화된 일부 투자가들을 본다. 그들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사회적 가치가 아닌, 오로지 집값 상승을 통한 자산 증식을 위해 문 정권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댓글에서, 블로그에서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 집값 올려준 문재인과 민주당이 고맙지 않냐’며, ‘지지를 해줘도 모자랄 판에 왜 비난과 비판을 하느냐’ 라고.

 

돈에 녹아든 정치는 국회에서만 비일비재하지 않다. 이런 썩은 인간들을 볼 때마다 나는, 40%에 달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과 30%를 향해 치닫는 이재명 도지사의 지지율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대깨문의 일기' 에서 묘사된 것처럼, 힘없는 서민만이 그들을 떠받들고 있는 게 아닌 것이다. 그들은 부동산으로 자산 증식을 이룬 新기득권층의 욕망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

 

돈 그리고 정치, 표 그리고 포퓰리즘. 국회에는 온통 돈을 이용해 표를 벌려는 자들, 거리에는 온통 표를 이용해 돈을 벌려는 자들의 세상이다.

 

벼락 부자와 벼락 거지의 탄생을 부른 부동산 양극화, 소득 주도 성장으로 인한 계층과 계층 간의 양극화, 코로나로 인한 기업과 업종 간의 양극화 그리고 이것을 정치적 밑거름으로 삼는 비열한 자들. 이 나라에 미래는 과연 존재하는가? 물음이 애처롭다.

 

나는 하나의 거대한 갤리선을 떠올린다. 배 밑바닥에 깔린 노예들이 울부짖으며 노를 젓고, 비단옷과 보석으로 한껏 치장한 선상의 귀족들은 고혹한 자태를 뽐내며 향기로운 와인을 마신다. 그리고 선실 앞에 선장이 모습을 드러내자, 갑판 아래의 노예들과 선상의 귀족들이 몰려나와 함께 소리치고 손뼉 치며 얼싸안는 희곡이 한창이다.

 

양극화의 항해. 선명히 보이는 수평선 너머에 짙푸른 대지는 없고 야자나무 가득한 섬도 없다. 그곳은 하늘과 바다, 그 안의 노예와 귀족 뿐이다. 그럼에도 배는 꾸역꾸역 물살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모르겠다. 이 배는 도대체 어디로 향하는 걸까.

 

분노의 포도


“땅을 사랑하는 사람은 증오하지 않으며, 땅을 위한 기도에는 저주가 없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존 스타인벡이 소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에 쓴 글이다.

1900년대 초반 미국 오클라호마주. 땅을 사랑한 그들은 삶의 터전인 농장을 떠나야 했다.

밀려드는 대규모 농업자본. 삽과 괭이로 일군 밭으로는 먹고살기조차 어렵다. 그들의 옥수수는 이미 가격 경쟁력을 잃어버렸으니. 서부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태평양의 햇살 아래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 면화밭…. 그곳에서는 먹고살 걱정만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하지만 일자리가 없다. 벌써 그곳엔 수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장남 톰 조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성직자의 눈에는 어찌 비쳤을까. 짐 케이시 목사, “제대로 살지도 못하는데 천국의 희망이 무슨 소용이겠어? 우리의 영혼이 슬픔에 잠겨 기가 꺾였는데….” 절망 속에 싹튼 분노는 포도알처럼 맺혔다.

우리 역사는 더 아프다. ‘전두환 시절’인 1980년대. 서울은 만원이었다.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 몸을 누일 집조차 없다. 주택 500만호 건설 계획이 세워진 것은 그때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무허가 판자촌을 허물었다. 아파트를 지어야 했으니. 상계동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것도 그즈음이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어찌 됐을까. 눈물을 머금고 떠나야 했다. 판잣집과 움집 지을 곳을 찾아. 1980년대의 저항. 그런 시대 상황이 또 하나의 배경을 이룬다.

정부가 주택 공공개발에 나섰다. 서울에만 32만호를 짓겠다고 했다. ‘뻥튀기한 숫자’라고도 한다. 어디를 개발할까. 쪽방촌에는 걱정이 태산처럼 쌓인다. 세 든 이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를, 집주인은 헐값에 땅을 빼앗기지 않을까를 걱정한다.

임대주택을 주겠다는 달콤한 약속. 믿어도 될까. ‘캘리포니아에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환상과 엇비슷하다. 왜? 아파트는 언제쯤 지어질까, 그때까지 어디에서 버텨야 하나, 임대보증금은 또 어찌 마련해야 하나…. 절망의 한숨들. 얼마나 많은 ‘분노의 이주’가 기다릴까.

강호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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