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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새벽이슬1 2013. 7. 28. 12:44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 Freedom is not free"

 

 

 

미국 워싱턴의 한국전쟁 기념공원에는 연간 수백만 명의 미국인이 찾는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 Freedom is not free"

 

 

-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1950 - 1953

 

-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나라와 국민을 지키기 위하여

부름에 응한 아들과 딸들에게 조국은 경의를 표한다. 1950 - 1953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 - West Point Academy

 

 

 

 

웨스트 포인트 . 육군사관학교

United States Military Academy

1950年 任官者 41名 韓國에서 戰死

 

 

 '365명 임관자 중 110명 사상(死傷),

41명 전사.' 1950년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임관한 직후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많은 희생자가 생겼던

미 육사(웨스트포인트) 1950년 임관자들의 기록이다.

미 육사 1950년 임관자들은 6·25전쟁에 참전했던

미 육사 기수(期數) 중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비운의 기수'로 꼽힌다.

이들을 추모해 서울 태릉 육군사관학교 교정엔

지난 1996년 10월 추모비가 건립됐다.

추모비엔 전사자 41명의 이름과 추모시가 새겨져 있다.

 

50년 임관자들은 '화려한' 기록도 갖고 있다.

지갑종 유엔한국참전국협회 회장은 "생존자 중

120명이나 장군이 됐는데 6·25전쟁 참전 경험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 이라고 말했다.

 

피델 라모스 전 필리핀 대통령이 이들과 동기생으로

1951년 필리핀군 소대장으로 철원 전투에 참전했다.

뉴욕주 출신으로 친한파 역할을 했던

존 머피 전 미 하원의원은 소대장으로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다.

 

 

 

 

 

 

 

 

통계로 본 6·25


이산가족만 760만명, 미군(美軍) 5만4000여명 사망

3년 1개월 참상 … 국군·민간인 80만여명 희생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시작한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동안 이어졌다.

국방부 국방군사연구소(현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한국전쟁피해통계집' 에 따르면 전쟁 직전 국군 병력은

북한(20만명)의 절반에 그치는 10만여명이었다.

장비도 북한이 T-34 전차 242대,

 전투기 등 항공기 211대였던 반면,

국군은 전차는 없고 항공기는 22대뿐이었다.

전쟁 기간 한국측 민간인 피해는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가 24만5000여명이며,

학살된 사람이 12만9000여명,

 

행방불명자가 30만3000여명이었다.

군인 피해는 사망자가 13만8000여명,

 

실종자가 2만여명이었다.

학도병 2000여명,

 

경찰관(청년단 포함) 3800여명도 전쟁 중 사망,

확인된 사망자만 50만명을 넘고 행불자를

 

합친 전체 희생자는 80만명을 웃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희생자로 따지면,

베트남전(군인 120만명·민간인 200만명 사망 추정)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았다.

또 주택 61만동(棟)이 폐허가 됐고,

이산가족 760만명이 생겨 전후에도 후유증을 겪었다.

북한측 피해는 민간인 피해자(사망·부상 등 모두 포함) 200만명,

군인 사망·부상자가 52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1950년 6월 26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로

유엔군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27일 미 해군과 공군, 29일 영국 해군,

7월1일 미 지상군과 호주 해·공군이 참전하면서 전선(戰線)은 확대됐다.

전쟁 기간 중 미국은 가장 많은 485만명(연인원) 병력을 보냈고,

이 중 5만4246명이 전사(戰死)했고 46만8659명이 부상을 입었다.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낸 영국(6만2000명)은

1078명이 숨지고 2674명이 부상당했다.

유엔 참전국 전체 피해 규모는 사망자 5만7933명,

부상자 48만1155명인 것으로 통계집에 나와있다. 

 

 

 

 

 

 

 

 

 

잊혀진 한국전쟁

 

 

우리가 6·25 전쟁을

세계 속에 잊혀진 전쟁으로 방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돌아보게 된다

 

1951년 4월25일 밤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 235고지.

 영국군 29여단 글로스터셔부대가 사흘 전 시작된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일곱 차례나 격퇴하고 나서

대대장 카네 중령은 말했다.

 

 "각자 알아서 후퇴하라. 나는 부상자들과 남겠다."

 

중공군 4만여명과 맞서 싸운 이 전투에서 영국군 50명이

전사하고 526명이 포로로 붙잡혔으며 56명만이 탈출했다.

 

▶ 설마리 격전을 비롯한 임진강 전투에서

영국군은 1개 여단 4000명 병력으로

중공군 4만명에 맞서 나흘을 용맹하게 버티면서

서울로 진격하던 중공군의 발목을 잡았다.

영국군 전사자 1100명 대부분이 임진강 전투에서 숨졌다.

 생존한 참전용사 50여명은 지금도 런던에 있는 선술집

'임진 퍼브(Pub)' 에서 모이고, 일부는 해마다 4월이면

파주에 있는 설마리 전적기념비를 찾는다.

 

 

▶ 6·25 참전국들은 피흘려 싸운 전쟁을 잊지 않는다.

캐나다는 작년에 가평 전투를 3부작 TV 다큐멘터리로 만들었고

필리핀도 재작년에 다큐를 방영했다.

미국은 중공군 인해전술에 근접전투와 백병전으로 맞섰던

양평 지평리 전투를 지금도 육군 전투교재로 쓴다.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의 외곽순환도로 이름은 '한국전 기념 고속도로' 이고

호주 사관학교 건물 이름은 '가평' 이다. 캐나다 위니펙의 부대는 '캠프 가평' 이다.

 

▶ 한국전쟁에서 16개국 유엔군 4만여명이 전사했다.

러나 이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부산 유엔묘지와 경기도 지역 전적비쯤이다.

유엔묘지 1만1000명의 유해 대부분은 본국으로 옮겨갔고

영국군 885명을 비롯한 영연방 국가 전사자들이 남아 있다.

숨진 곳에 묻는 영국 풍속에 따른 것이다.

영국·뉴질랜드 호주의 참전 부대들은 지금도 가평 · 포천 

전적비가 있는 지역 학교들에 장학금을 대준다.

 

 

▶ 더타임스 기자 등으로 한국에서 활동한 영국 저널리스트 앤드루 새먼이

 '마지막 총알(To the Last Round)' 이라는 책을 영국에서 펴냈다.

임진강 전투에 참전한 영국군 50여명을 2년 동안 만나 쓴 한국전쟁 논픽션이다.

그는 한국전쟁이 2차대전과 베트남전 틈바구니에서 잊혀져 가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나보다 한국인이나 한국 정부가 먼저

참전군인들 이야기를 발굴해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의 말에 낯이 뜨겁다.

 

 

 

 

  

 

 

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 

You are not forgotten

 

  

전사자들에게 꽃을 바치며 자유의 의미를 되새기는 명소다.

 

6·25 당시 미군 3만6000여 명이 전사했다.

 

사망자 중 최고위 장성인 월턴 워커 8군사령관(중장)은

아들과 함께 참전했다가 같이 전사했다. 

 

밴 플리트 장군과

마크 클라크 장군(유엔군사령관)도

함께 참전했던 아들을 잃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영웅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34대 대통령)의

아들 역시 이 땅에서 산화했다.

 

▷ 워싱턴 한국전쟁 기념공원의 비문()

‘자유는 꽁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라고 쓰여 있다. ‘

 

미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들,

 전혀 알지도 못했던 나라의 자유를 위해 달려갔던

자랑스러운 우리 아들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는 글귀도 있다.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도 국군 및 유엔군 전사자와

무명용사 등 20여만 명을 기리는 ‘추모의 공간’ 과

‘Freedom is not free’ 라는 똑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개관 15주년을 맞은 이곳엔 요즘 하루 3000여 명이 다녀간다. 

▷ 젊은 세대에게 6·25는 ‘잊혀진 전쟁’ 이 돼가고 있다.

 

목숨을 걸고 자유를 지켜준 참전용사들이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은인()들이다.

이맘때 미국에서는 중소도시에서도 백발의 6·25 참전 용사들이

군복 차림에 훈장을 자랑스럽게 달고

연단에 올라 시민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는다.

주민축제의 영웅들이 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촛불만 널려 있고 6·25가 없는 우리의 6월과는 대조적이다.

▷ 6·25 남침 60주년인 내년부터 전사자 유해 발굴이 비무장지대(DMZ)로 확대된다.

 

유해는 지난 10년간 3000여 구를 찾았으나 아직도 13만여 명이 묻혀 있다.

6·25 당시 한강에 추락한 전투기 조종사의 유해를 찾겠다며

작년 5월 한강 바닥을 뒤진 미국의 열정이 감동을 준 바 있다.

 ‘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You are not forgotten)’ 는 미국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

차제에 560여 명에 이르는 생존 국군포로 송환 방법도 적극 모색할 일이다.

 

 

"You are not forgotten - Freedom is not free"

 "잊지 말자 -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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