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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폭파범 김현희의 한국생활 24년 풀 스토리 본문
[인터뷰] - “사는 게 힘들어 대외 활동할까 고민 중”- -- ‘KAL기 폭파’ 김현희의 한국 생활 24년 풀 스토리 -- -- 2011.02.09 -- 첫인사는 어떻게 할까. 대화의 물꼬는 어떻게 터야 할까. 1997년 자신의 경호원이었던 정모 씨와 결혼한 후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녀의 나이 스물다섯. 네 살 때까지 쿠바에서 자랐다고 하니 "이젠 여자로 살고 싶다"고 했던 그녀는 서울 광화문 근처의 한 식당. 문 앞에서 먼저 맞은 것은 경호원들이었다. "안녕하세요." 기자와 경호원들과의 짧고도 어색한 인사가 이어진 후 긴 머리에 통통한 볼살로 기억되던 그녀는, 작아졌고 길었던 생머리는 산뜻한 쇼트커트로 변신해 있었다. 그녀의 옆자리는 그간 지면을 통해 이니셜로만 밝혀졌던 얼굴이 너무 작아져 다들 성형했느냐고 묻는데, 아니에요. 눈 아래 자글자글한 주름 보세요. 지내시긴 어떠신가요. 좌파 정권(그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절을 생활하기도 어렵지만 우리 나름대로 투쟁해야죠. 지난 정부 때 '김현희 가짜설'이 제기되면서 계속 그렇게 은둔 아닌 은둔 생활을 할 생각입니까. 제가 상황이 무척 어렵습니다. 잠자고 있던 한밤중에 MBC 방송 프로그램(PD수첩)팀들이 (2010년 봄 그녀가 12년 만에 말문을 열었던 현재 쥐와 바퀴벌레가 돌아다니는 네 식구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좁은 집에 있다 보니 계속 이렇게 살 수 없을 것 같아 결혼하신 지 14년째인데, 슬하에 자녀는 어떻게 됩니까.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습니다. 공장 문 닫기 직전에 낳은 셈이죠.(웃음) 한창 키우기 힘드실 때네요. 예, 엄마 손이 많이 갈 때죠. 숙제 봐주느라 힘들어요. 북한에서 배운 교과 내용과 달라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 그래서 무척 어려워요. 남한 교과과정과는 완전히 다르거든요. 제가 먼저 공부하고 가르쳐 주는 식이죠. 오늘 어떻게 오셨습니까. 뭐, 그리 어렵지 않게 왔습니다. 경호원이 24시간 따라다니는데, 예, 경호원들과 같이 갑니다. 재래시장은 단골이 되면 조금이라도 더 싸게 살 수 있잖아요. 시장에 가면 가격 대비 품질을 경호원 보호 하에서 이 인터뷰는 어떻게 가능합니까. 경호원들은 제 신변 보호만 하기 때문에 북한의 위협을 감지한 적은 없으십니까. 이한영 피살 사건(김정일의 처조카인 탈북자 이한영 씨가 당시에는 경찰이 전화해 알려주는 바람에 바짝 긴장했었죠. 여행은 자주 다니십니까. 해외여행도 가시나요. 멀리는 못 가고 사는 곳 주변만 다닙니다. 일본에 갔던 것이 처음이었어요. 특별히 배려해 줘서 허가를 받았죠.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수한 신분인데 하루 일과는 어떻습니까. 남한에 온 뒤로는 늘 경호원들(경호팀은 주기적으로 바뀐다)이 있어서 보통 사람과는 아무래도 처지가 좀 다르죠. 1997년 결혼하면서 조용히 살려고 마음먹었어요. 그런데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특히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아직 해결이 안 돼 방황 생활을 하고 있어요. 너무 괴로워 자살까지도 생각했는데 되고 말겠다는 생각에 참고 견뎠죠. 자본주의 사회에 완전히 적응하셨나요. 저는 좀 특수합니다만 보통 탈북자들이 (남한에) 오면 '이자'라는 게 왜 생기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 되거든요. 이자란 게 없어요. 이자가 없는 대신 저금액이 많은 사람에게는 이자가 이해되지 않았다면 주식 투자는 두말할 필요도 없겠네요. 그럼요.(웃음) 저는 형편도 어렵고 주식이란 게 다른 탈북자들에게는 환상 같은 것이 될 수 있겠죠. 특별한 취미 생활이 있습니까. 아직은 취미 생활하기가 어렵습니다. 책은 여러 가지로 많이 봅니다. 잡지도 보고요. 다시 보니 그 책 내용이 북한과 너무나 흡사하더라고요. 등산 갈 때도 경호원과 함께 갑니까. 예, 같이 가야죠. "북한은 경제 위기로 자멸할 것" 24년의 이야기를 짧은 시간에 정리하기란 어차피 불가능했다. 어떻게 살았는지 '생활인 김현희'를 알아가는 동안 대접했던 찻잔도 어느새 식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기자보다 그녀가 더 하고 싶은 얘기들이 있을 법해서다. 노무현 정부 때 MBC TV 'PD 수첩'과의 그 후로 어떤 식으로든 접촉이 있었습니까. 저는 MBC 때문에 제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왔고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곳에 진정해 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그렇게 말씀하신 분들도 있었는데, 정부 차원에서 결단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아직도 알아봅니까. 요즘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하더라고요. 신입 사원 대부분이 1980년대생이더군요. 그러니까 안보 교육을 더 잘해야 한다고 봅니다. 남한에 산 것이 햇수로 벌써 24년입니다. 지난 24년은 어땠나요. (그는 바로 답변을 못하고 한동안 침묵했다) 결국 왔고…. 제 운명이 그런가 봐요. 사실 북한과 남한은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모든 주민들이 기와집에서 고깃국 먹으며 잘 살고 여성들이 가사에서 해방된다고 선전해 왔죠. 하지만 김정일 시대에도 안 됐고, 더욱 나빠지기만 해서 북한 주민들이 아사 직전 상태입니다. 물질적인 면에서는 남북한이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하지만 물질적으로 풍부하니까 2010년 천안함 사태 등이 사실 그동안 북한을, 즉 '적'을 지난 10년 동안 북한을 해롭게, 저 같은 경우죠. 물질적인 것만큼 정신적인 것도 건강해야 하는데, KAL기 사건은 북한의 대표적 테러 사건인데 8년째 칩거하고 있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결혼 전엔 (강연과 간증으로) 결혼 후엔 시골에서 조용히 참회하면서 살려고 했어요. 제가 활동을 너무 많이 하니까 싫어하는 분들도 있었거든요. 1997년에 (KAL기 사건) 유가족 분들을 만났습니다. 제가 수기를 썼었는데, 그때 유가족 대표께서 그런데 바로 이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어요. 그땐 이제 막 아이를 낳아 키우는 저를 공격하기도 뭐했는지 노무현 정권 때는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힘들었습니다. 'PD수첩' 팀이 밤에 쳐들어 왔었다고요. 그땐 'PD수첩'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한 살, 세 살로 어릴 때여서 당장 갈 데도 없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거사정리위원회 등이 조사하겠다고 처음엔 왜 쫓겨났는지도 몰랐는데 그렇게 힘들 때 같은 편이 돼 준 사람이 없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생활은 어떻게 하십니까.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예요. 북한에서는 회랑식 아파트(남한의 복도식 아파트, 북한식 용어를 사용하곤 했다)에 살았는데 그런데 같은 상황을 남한에서 다시 겪게 됐죠. 쥐와 바퀴벌레가 들끓는 곳에서 살면서 너무 힘들었지만, 북한에서도 살았는데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까. 친구도, 친지도 모두 외면하더라고요. 정신력이 강한 것 같습니다. 북에서 공작원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거기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북한 주민들이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북한이 무너진다면, 경제 때문일까요. 예. 한마디로 경제 때문에 북한은 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이기 때문에 계획경제 시스템입니다. 식량은 배급제죠. 1986년부터 상황이 나빠져 1986년께부터는 북한에서도 시장이 활성화됐어요. 돈만 있으면 시장에서 뭐든 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1997년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고 하잖습니까. '김정일-김정은'에 이어지는 후계 체제 속에서 북한이 망할 것이라고 보십니까. 그들도 알고 있지만 경제가 해결 안 되니까 제가 살 때만 해도 지금처럼 불만이 크지는 않았는데 말입니다. 2009년에 화폐를 개혁한다고 중산층 돈을 다 거둬가는 바람에 북한 주민들의 의식도 예전보다 많이 깨어서 북한은 핵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2010년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 사건을 북한의 도발을 보면서 1987년 KAL기 사건 때나 지금이나 연평도 사건은 북의 내부 사정이 다급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겁니다. 한 해 두 번씩이나 직접적인 도발을 한 것은 신앙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남한으로 와서 자백하고 사형 선고까지 받는 과정을 겪으며 그때 박세직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어떻게 하면 저를 도와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하나님 말씀 듣고, 기도하고, 좌파 정부 시절 어려울 때도 가족과 함께 교회를 자주 가지는 못하고 가끔 가는데 요즘 기도의 내용은 무엇인가요. 주로 아이들에 관한 것이죠. (천안함 사태 등) 사건 있을 때마다 저는 KAL기 사건의 산증인이잖습니까. 그런 사건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에서 제작된 드라마 'K 프로젝트( KAL기 폭파범 김현희를 일본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일본 TBS의 특집 드라마. 국내에는 방영되지 않았는데 혹시 보셨는지요. 얼마 전에 (일본에서) 테이프를 보내왔는데 거의 1년 동안 기획해 KAL기 사건 23주기에 맞춰 그런데 그때 연평도 사태가 일어나 방영 시기가 미뤄졌어요. 일본에서는 시청률이 굉장히 높았다고 들었습니다. 북한 소식은 어떻게 접하십니까. 신문을 통해서 보기도 하고 요즘은 탈북자들이 많아서 소식이 잘 들어옵니다. 통일에 대한 솔직한 생각은 어떻습니까. 통일이야 돼야죠. 가족도 거기 있고요. 언젠가는 돼야죠. 남한도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김정일 체제가 그렇게 오래가겠습니까. 하지만 지난 정부 때처럼 맹목적으로 북한을 도와주는 건 가족 소식은 들으십니까. 제가 맏딸로, (남한에) 올 때는 부모님은 돌아가시지 않았나 추측만 합니다. 처음에 가족 때문에 힘들었죠. 아이들이 엄마가 '마유미'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아직은 어려서 뭐든 '그게 뭐야'라고 묻는 정도인데,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얘기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나요. 남편이 보내는 것을 싫어해 안 보냅니다. 아이들은 자유롭게 놀면서 커야 한다고 얘기하는데, 8년 전에 갑자기 집을 나오면서 학교를 보내놓고 보니까 남편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처음 왔을 때부터 만났던 사람(수사관)이죠. 그때는 남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좀 지나고 보니 배려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과 다르게 느껴졌었죠. 어떤 계기가 있어 남편과 자연스럽게 다시 만나게 됐어요. 정부가 승인해 주지 않아 결혼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어요. 남편께서 결혼과 함께 국정원을 그만두셨죠. 저와 결혼하고 그 직장을 계속 다니는 것은 어려우니까 그만뒀죠. 두 아이들에게는 '북한'을 어떤 나라로 말해 주십니까. 이모와 삼촌이 있다고 말하긴 했는데, 구체적으로 말해 주지는 않는데 큰아이는 눈치로 아는 것 같아요. 동생한테 '북에 있지'라고 말해주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해 어떤 일을 했으면 하십니까. 하고 싶은 것을 했으면 합니다. 자유롭게 해 주고 싶어요. 제가 너무 이런 생활을 해 와서 자유롭게 살았으면 해요. 아이들과 노래방도 가십니까. 한 번인가 두 번 간 적 있어요. 처음엔 귀 막고 있더니 나중엔 마이크를 놓지 않더라고요. 가계부도 쓰시나요. 가계부는 제가 쓰지 않고 남편이 쓰죠. 그때부터 가계부를 꼼꼼히 쓰면서 (옆에 있던 남편은 그 당시 철저한 생활비 관리 덕에 그때 습관이 남아서 그런지 요리 솜씨는 어떻습니까. 남한에 온 지 얼마 안됐을 때는 점차 남한 음식을 시도하게 됐는데, 남편이 경상도 출신이라 맵고 짠 찌개를 엄청나게 좋아해요. 갈치조림도 하고 찌개도 하고 이제는 재료만 있으면 기본은 하는 것 같습니다. 24년을 남한에 살았으니 북한에서 산 기간보다 깁니다. 예. 북한에서는 교육받은 것밖에 없고 산 것으로 따지자면 이제는 남한 사람이죠, 뭐. 남한 식으로 생각하고, 물론 북한은 나서 자란 곳이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 울분을 토하기도 했고 대한민국(남한)을 위해 할 일이 있다면요. KAL기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와 증인으로서 사건을 진짜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지난 10년간 (남한)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고 느꼈습니다. 집안에서 내부의 적을 단속하지 않고 휴대전화도 없이 친지나 지인과 연락도 쉽지가 않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과 어떻게 연락하십니까. 친지들과 연락을 별로 안 합니다. 오히려 휴대전화 같은 것이 있는 게 도움이 안 됩니다. 남편이 어디 가서 연락이 없어도 그저 오겠지 합니다. 남한에 오신 뒤 친구는 만드셨나요. 항상 보호를 받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에 수사관 중에 후에 한 번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는데, 말이 통할 것 같더라고요. 여생에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바레인공항에서 음독자살에 실패하신 후 본의 아니게 책도 쓰고 그랬는데, 평범하게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북에 납치된 일본인들 문제도 제가 제기했던 것인데, 그분들도 북한에 의한 피해자들이기 때문에 일생을 통해 가장 고마운 사람이 있다면요. 고마웠던 분들도 많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은데, 어려울 때 옆에서 항상 지켜줬고요. ------------------------------------------------------------------------------- [돋보기] KAL858기 폭파 사건은…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인도양 상공(미얀마 안다만 상공)에서 폭파돼 수사 이틀째인 12월 1일, 기내에 폭탄을 두고 내린 사실이 알려졌다. 일본인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의 정체는 북한 대남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로 밝혀졌다. 두 사람은 12월 1일 바레인 공항에서 붙잡혀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음독 직후 사망했고 한국 정부가 신병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김현희는 한국 정부의 보호 하에 압류됐다가 1990년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됐지만 이후 정부 '관리'를 받으며 세간의 화제가 됐던 에세이집도 내고 '남한 여자'로 살다가 1997년 전 국가안전기획부 수사관 출신 정모 씨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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