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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복음화의 큰별 떨어지다-김준곤목사 소천. 본문

예수-그 신앙의 세계

민족복음화의 큰별 떨어지다-김준곤목사 소천.

새벽이슬1 2009. 10. 1. 21:54

‘민족복음화의 꿈’ CCC 총재 김준곤 목사 소천

오전 11시 11분 경, 빈소는 세브란스병원 [2009-09-29 12:20]

▲故 김준곤 목사.
민족복음화의 꿈을 품고 일생을 헌신해왔던 김준곤 목사가 오늘 오전 11시 11분경 소천했다. 향년 85세.

 

1958년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설립해 청년 복음화의 초석을 놓았던 김준곤 목사는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 없는 규모의 ‘74 엑스플로 대회’와 ‘80 민족복음화대성회’를 개최하며 민족 복음화의 염원을 불태웠다.

 

국가조찬기도회를 구축해 위정자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리를 만들었고 지속적으로 성시화운동을 펼쳐나갔다. 한국교회 역사의 산 증인이라는 말로 그를 표현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빈소는 서울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어 있다.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예수의 꿈을 꾸고…”

김준곤 목사의 인생 역정, 비전 그리고 헌신 [2009-09-29 19:03]

김준곤 목사의 인생 역정

▲故 김준곤 목사.
김준곤 목사는 1925년 3월 28일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 봉리에서 부친 김면주 씨와 모친 김통안 씨의 사이에서 8남 중 넷째로 태어났다. 일곱살 때 모친의 친척 되는 낙도의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로부터 처음 복음을 들었다. 고인은 무안농업실수학교(현 무안중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에 있는 동양척식회사에 근무하면서 교회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만주 봉천신학교에 입학을 했다가 일제 징용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만주의 김인석 목사 댁에서 피신해 있었다. 고인은 당시 새벽에 교회당에 나와서 기도하고, 김인석 목사가 소장하고 있던 신학, 문학, 철학서 등 2,000여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성경 암송을 시작해서 수백 구절을 암송했다.

 

고인은 1946년 조선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조선신학교는 당시 김재준 교수와 송창근 교수의 자유주의신학 논란으로 정규오, 박창환, 조동진, 한완석, 김성진, 엄두섭 등 51인 신앙동지회 학생들과 함께 부산에 있는 고려신학교로 내려가 한 학기를 공부한 후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가 복구되자 다시 올라와 학업을 계속해 1948년 9월 장로회신학교 제1회로 졸업하였다.

 

고인은 초등학교 교사였던 인정진 사모와 결혼해 1녀(은희)를 두었으나 1950년 10월 3일 공산당에 의해 인정진 사모가 순교를 당하였고, 부친도 학살을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리고 본인도 거반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국군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고인은 1951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조선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하고, 광주숭일중고등학교 교목, 교장으로 봉직했다. 이후 여수 애양원 나환자 신학교인 한성신학교 교수로 잠시 사역한 후 1957년 미국 풀러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CCC 설립자 빌 브라잇 박사를 만나 한국에서 CCC 사역을 시작할 권유를 받고 귀국해서 1958년 11월 2일 한국CCC를 창설하였다. 고인은 대학생선교회를 시작하면서 자신이 직접 전도를 해서 제자를 양육하겠다고 다짐하고 고려대, 서울대, 이화여대를 중심으로 개인전도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해서 고인을 통해 전도 받고 양육받은 제자들은 정정섭 장로(기아대책 회장), 두상달 장로(기아대책 이사장), 김영숙 권사(가정문화원 원장), 최호자 권사(성시화운동 중보기도팀장), 박세환 장로(예비역 육군대장), 권영필 권사(변정일 전 의원 부인, 약사), 주수일 장로(칠성섬유 회장), 김경수 장로(재미 치과의사), 김인중 목사(안산동산교회), 하용조 목사(온누리교회),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민산웅 장로(전 극동방송 부사장), 윤수길 선교사(태국) 등 수많은 인재들을 키워냈다.

 

민족복음화의 비전과 기도 그리고 헌신

고인은 민족의 수난과 개인과 가족의 고난을 겪으면서 민족 복음화를 위해 기도했다. 특히 1962년 2월 서울 삼각산에서 친구인 박요한 목사(장로회신학교 1회 동창으로 예장합동 증경 총회장을 지냈고, 섬선교 사역 중)의 누님이 운영하는 민족기도원에서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지구상에서 단 한 민족만이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뿌리째 송두리째 복음화되도록 기도하면서 성령의 뜨거운 감동으로 민족복음화의 환상과 비전을 체험했다. 그 내용은 ‘민족복음화의 환상과 기도’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다. 또 ‘그리스도의 계절’이라는 제목의 노래로도 만들어져 널리 불리고 있다.

 

“어머니처럼 하나밖에 없는 내 조국. 어디를 찔러도 내 몸같이 아픈 내 조국. 이 민족 마음마다, 가정마다, 교회마다, 사회의 구석구석, 금수강산 자연환경에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시고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땅에 태어나는 어린이마다 어머니의 신앙의 탯줄, 기도의 젖줄, 말씀의 핏줄에서 자라게 하시고 집집마다 이 집의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시고, 기업주들은 이 회사의 사장은 예수님이고 나는 관리인이라고 고백하는 민족, 두메마을 우물가의 여인들의 입에서도, 공장의 직공들, 바다의 선원들의 입에서도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시고, 각급 학교 교실에서 성경이 필수 과목처럼 배워지고 국회나 각의가 모일 때도 주의 뜻이 먼저 물어지게 하시고, 국제시장에서 한국제 물건들은 한국인의 신앙과 양심이 으레 보증수표처럼 믿어지는 민족,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삼으며 신구약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는 민족, 민족의식과 예수의식이 하나된 지상 최초의 민족, 그리하여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예수의 꿈을 꾸고 인류구원의 환상을 보며 한 손에는 복음을 다른 한 손에는 사랑을 들고 지구촌 구석구석을 누비는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류재광 기자 jgryoo@chtoday.co.kr

 

옥한흠 목사 “제2의 김준곤 목사님이 필요”

위로예배에 지도자들 방문… 각막은 기증키로 [2009-09-29 19:02]

▲한국교회의 대표 지도자이자 CCC에서 고인으로부터 신앙을 배운 옥한흠 사랑의교회 원로 목사가 위로예배에서 기도하고 있다. ⓒ 송경호 기자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이러한 기도가 먼저 나왔습니다. ‘목사님을 데려가기만 하지 마시고 목사님 같은 분을 보내주세요’라구요.”

사랑의교회 원로 옥한흠 목사가 故 김준곤 목사를 회고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청년 복음화의 아버지요 민족 복음화의 파수꾼과도 같았던 김준곤 목사의 갑작스런 소천 소식에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고인의 수많은 제자들이 세브란스 병원에 마련된 빈소를 방문했다.

유가족들은 29일 오후 5시 위로예배를 드렸으며 주서택 목사의 사회, 오정현 목사의 기도에 이어 옥한흠 목사가 설교를 전했다. 축도는 이만신 한기총 명예회장이 맡았다.

 

옥 목사는 청년시절 CCC에서 고인의 지도 아래에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하용조 목사(온누리교회),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와 함께 신앙의 교제를 나눴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향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성장, CCC의 청년 사역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을 가늠하는 사례로 꼽히고 있다.

▲위로예배를 마치며 이만신 한기총 명예회장이 축도하고 있다. ⓒ 송경호 기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장 19~20절)

 

옥 목사는 “목사님께서는 이 말씀대로 살길 원하셨던 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를 환하게 비춘 큰 횃불이 졌다”며 “목사님을 늘 짝사랑했었다. 그를 흠모했으며 어떻게 하면 그를 닮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많은 도전을 받았다”고 말했다.

 

옥 목사는 “한국교회를 볼 때마다 김 목사님의 발자취를 발견하지 못하는 곳이 없다”며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목사님 같은 분을 한국교회에 보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고 전했다.

 

이어 옥 목사는 “목사님께서는 60, 70년대를 지나 80년대 한국교회 부흥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다. 한국교회를 이만한 기반 위에 올리신 분이 없다고 본다”며 “CCC에서 배운 이들이 이제 목회자가 되어 한국교회를 이끌고 사회에 나가 기독교 세계관을 퍼뜨리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전했다.

 

옥 목사는 “한 사람이 일할 수 있는 분량으로서 과연 목사님을 따라갈 인물이 있느냐고 물으면 찾기 힘들다. 그분의 역할은 참으로 놀라웠다. 가감 없이 말할 수 있지만 오늘의 한국교회를 있게 한 장본인이다. 이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이다”라고 전했다.

이에 옥 목사는 “밤낮 없이 부르짖었던 목사님의 기도를 들어 달라. 복음에서 점점 멀어지는 한국교회를 바로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다.

 

한편 고인을 추모하는 위로예배는 30일(수) 오후 7시, 10월 1일(목) 10시 및 오후 7시에 있으며 입관예배는 30일(수) 오후 2시, 고별예배는 2일(금) 오전 9시, 하관예배는 2일(금) 오후 2시에 있을 예정이다.

 

또 장례예배는 CCC와 한국교회가 함께 한국기독교교회장으로 10월 2일(금)오전 10시 영락교회에서 드릴 예정이다. 김 목사의 각막은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기증된다.

송경호 기자 khsong@chtoday.co.kr

 

서경석 목사 “엑스플로74 비록 비판했지만…”

[추도사] 항상 꿈을 꾸시며 청년으로 사신 목사님의 소천을 애도하며

                                                       [2009-09-30 07:35]

▲ 서경석 목사(기독교사회책임 공동대표).
목사님 가신 것이 너무도 안타깝고 섭섭합니다. 결국은 헤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고 천국으로 가신 것을 슬퍼만 할 수 없지만 목사님이 떠나신 빈 자리가 너무 커서 허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저는 김준곤 목사님의 제자지만 그렇다고 정통파 제자群에 속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CCC를 다녔지만 오래 다니지도 못했고 진보적인 기독학생운동인 KSCF에 속해서 Explo74 행사를 비판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오랜 신앙적인 방황을 거쳐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는 다시 복음주의자가 되었고 경실련 사무총장 시절 목사님을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저를 반갑게 맞아 주셔서 목사님과의 만남이 다시 이어졌지요. 지금도 정동 CCC채플에서 신앙 간증을 하던 기억, CCC 하기수련회에서 간증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리고 그 후 20년 가까이 목사님과 깊은 친분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저를 특별히 사랑해 주시고 항상 지지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오해하는 많은 분들에게 저를 변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請을 들어주셔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상임대표도 되셨고, 나눔과기쁨, 기독교사회책임에도 깊이 관여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제 주위에서 제가 김준곤 목사님과 가깝게 지내는 것에 대해 문제 제기가 있었습니다. 과거에 제가 간 길과 목사님이 간 길이 많이 달랐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목사님은 그랬기 때문에 저를 특별히 돕고 싶어 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저를 돕는 것을 통해 지난 날을 보상하고자 하셨습니다.

 

CCC 젖염소목장, 원수를 사랑으로 품은 결과

김준곤 목사님께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를 하시면서 황해도 봉산군에 CCC 젖염소목장을 만드신 것은 감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젖염소는 풀을 먹기 때문에 사람과 먹이 경쟁을 하지 않지요. 그러고도 염소젖은 우유와는 달리 사람이 완전히 소화를 하지요. 그래서 어린아이에게 너무 좋은 식품이지요. 그렇지만 북한의 재래종 염소는 젖이 잘 나오지 않아 뉴질란드의 자넨종을 북에 보내어 종축개량을 하는 것이 꼭 필요했는데 김준곤 목사님이 결심하셔서 봉산군에 대규모 목장이 건립될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제게 젖염소 목장의 아이디어를 준 것이 너무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님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감동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김준곤 목사님은 아내와 아버지가 공산군에 의해 살해당하고 당신 자신도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셨는데 이러한 공산군의 악행을 북한 주민에 대한 사랑으로 갚으셨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과 함께 봉산군 CCC 목장을 함께 걸으면서 목사님이 지난날의 감회를 말씀하시면서 눈물을 글썽거리시던 모습을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또 목사님은 제가 나라 걱정을 하면서 사회원로 성명을 조직할 때마다 항상 서명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향해 바른 말을 하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을 사람들은 민족 복음화의 역군으로만 생각하시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 구원 뿐 아니라 사회 구원 문제에서도 똑같은 관심을 가지고 애써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시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목사님을 CCC 실무자들이 때로는 따라가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김 목사님이 바로 그렇게 비전을 꿈꾸고 비전을 실현하려고 애쓰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오늘의 CCC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북한 위해 결정적인 순간 사용할 ‘식량은행’ 다시 시작해야

또 참으로 아쉬운 때도 있었지요. 한번은 목사님께서 식량은행(Food Bank)을 시작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셨지요. 각 교회가 전부 통장을 만들어 저축을 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북한을 위해 쓰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뜻을 따라 이 일을 시작했는데 마침 같은 시기에 비슷한 단체가 생기는 바람에 그 운동과 통합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 목사님께서 할 수 없이 이 생각을 접으실 수밖에 없었지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 고집을 부려서라도 그 일을 했으면 지금쯤 식량은행은 엄청나게 켜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소천하신 지금 목사님의 유지를 받들어 다시 식량은행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북한의 앞날이 극히 불투명한 지금, 김준곤 목사님이 꾸셨던 꿈이 기필코 실현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일년에 몇 번씩 목사님을 만나 뵐 때마다 목사님은 적어도 30분 동안은 제게 한국교회가 큰 위기에 처해 있다며 걱정을 하셨습니다. 큰 교회들이 물질주의, 상업주의에 빠져 참된 복음의 길을 가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하셨습니다. 미자립교회는 매년 3천 교회씩 문을 닫는데 교인들의 수평이동으로 커진 대형교회들은 개교회주의에 빠져 있다며 크게 개탄해 하셨습니다. 큰 교회와 작은 교회와의 갈등의 문제를 김준곤 목사님처럼 개탄해 하신 교회 지도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김 목사님께서 그토록 안타깝게 문제시하는 데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 너무 실망스럽습니다.

 

왜 기독당 만들었는지 속마음을 바라봐야…

목사님께서 작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셨기 때문에 제가 ‘나눔과기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작은 교회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운동을 시작할 때에도 기꺼운 마음으로 오셔서 설교하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때 목사님께서 해주신 문준경 전도사님의 대신 거지 이야기와 119아줌마 이야기는 ‘나눔과기쁨’의 작은 교회 목사님들에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말씀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항상 나라를 걱정하시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그런 모습에서 항상 자극과 격려를 받은 사람입니다. 목사님이 나라를 걱정하신 나머지 기독당을 만드는 일도 하셨지요. 저는 기독당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목사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목사님은 전략가나 정치가가 아니시지요. 그래서 우리가 목사님을 이해할 때에는 전략적 판단의 옳고 그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의 속 마음을 보아야지요. 목사님은 자신의 행동을 통해 우리에게 세상 속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면서 하나님 나라 건설에 나서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이지요.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도 열심히 나서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난주에 목사님께 병문안을 갔을 때 목사님께서 주신 마지막 말씀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출세할 생각 말고 겸손하게 나라와 교회를 위해 열심히 헌신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사회책임’이 교회의 희망이라며 열심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일제시대 국적도 없이 고생하며 독립운동을 한 애국자들을 생각하면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하시기 힘이 드신데도 힘들여 말씀해 주신 그 말씀들 고히 간직하며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목사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목사님처럼 꿈을 꾸고 그 꿈을 실천하며 사는 비전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나이가 70, 80이 되어도 청년처럼 꿈꾸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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