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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판사가 게릴라식으로 대법관 죽여? |
젊은 판사들에게 신영철 인민재판하는 박시환의 정체? |
![]() ![]() 사법부에 뙤리를 튼 게릴라 수장 박시환 박시환이라는 대법관이 젊은 판사들을 선동했다. "지금 상황은 5차 사법파동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이번 사태를 신영철 대법관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고 넘어가면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판사들의 절차와 규정을 지킬 것을 강조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건 합리적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다. 4·19와 6월 항쟁도 절차와 규정은 지키지 않았다." 후자의 말은 “소장법관들이 대법관 사퇴를 요구하는 것은 '법관은 탄핵 또는 금고 이상 선고에 의하지 않고는 파면되지 않는다”고 규정한 헌법(7조)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지적에 대한 반박이었던 모양이다. 법관들도 혁명을 할 수 있으며 혁명에는 법과 절차가 무시된다는 말로 들린다. 사법부의 좌경 게릴라 판사가 150명 선이라니! 박시환은 1988년6월 2차 사법파동 당시 김종훈 판사, 한기택 판사, 유남석 판사, 강금실 판사 등과 함께 우리법연구회를 결성했으며 1993년 3차 사법파동 때는 서울민사지법 단독판사협의회 공동의장을 맡아 ‘사법부 개혁요구’ 성명을 주도해 김덕주 당시 대법원장의 퇴진을 이끌어냈다. 우리법연구회 소속 판사들이 지금 소장판사 집단행동을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법연구회는 매달 모임을 가지며 현재 회원은 150명 정도라 한다. 군에서도 하나회가 사조직이라며 사회적 몰매를 맞은 판에 외롭게 양심과 투쟁하면서 판결문을 써야 한다는 판사 사회에 좌경 판사들이 150여명씩이나 사조직을 만들어 잘못한 게 없는 보수우익 대법관을 인민재판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Digress) 위에서 한기택 판사는 필자와 악연이 있었다. 1999년 인천에서 발생한 나이키 유도탄 오발사고 때 KBS의 요청으로 군사평론 한 것을 가지고 당시 국방장관 천용택이 당시 반공포 사령관 김규소장(현 재향군인회 안보국장)을 시켜 사고원인에 대한 피고의 평론이 군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고소한 황당한 사건을 한기택 판사가 담당했던 것이다. 그는 수원지법에서 필자와 결투를 하듯 싸우다가 42쪽의 판결문을 써서 필자에게 300만원의 벌금을 물린 후 태국 수영장에서 심장마비를 당했다고 한다. 나이키오발사고에 대한 재판 이야기는 너무나 황당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 땅에 정리해 남기고 싶다. 판사들이 과학적 진실에 죄를 씌운 사건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를 갈리레오 재판보다 더 황당한 코미디 재판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대한민국 판사들의 현주소를 피부로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이키재판만큼 황당한 재판이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일 것이다. 좌익 대법관이 우익 대법관 죽인다! 박시환은 2003년 한 시민단체가 자신을 대법관 후보로 추천했으나 대법원장이 자신을 제청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자 \"대법관 선임 내용이 종전과 아무 차이점 없이 기준과 방식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며 법절차를 공격하면서 사표를 내고 나갔다가 2005년 노무현에 의해 대법관에 임명된 사람이다. 지방법원장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일약 대법관이 되어 대한민국 지키기를 하는 신영철 대법관 죽이기에 앞장 선 것이다. 언론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 그는 지난 5월12일, 이용훈 대법원장이 신 대법관 문제를 놓고 소집한 대법관 회의에서 자기 말고 다른 11명 대법관이 취한 태도에 대해 언론에 대고 이렇게 비난했다. "다들 동료 대법관 문제라서 대법원장이 잘 알아서 판단해달라는 식으로 추상적으로만 얘기하더라. 실망스러웠다. 이 시대에 대법관을 하고 있다면 책임을 져야 하는 건데…" 자기와 의견이 다른 11명의 대법관들을 언론을 통해 비판한 것이다. 일부 나쁜 판사들이 신 대법관이 지법원장이었을 때 보냈던 이메일을 보관하고 있다가 신영철이 대법관으로 출세하자 언론에 유출시켜 지금의 파동을 이끌어 낸 것과 같은 게릴라 전술을 사용한 것이다. 박시환은 공안검찰의 숙적 우리나라 사법부내 개혁 목소리의 한가운데는 언제나 박 변호사가 있었다 한다. 공안 검찰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도 소신 있게 구속영장을 기각하고 무죄를 선고했으며 국가보안법과 양심적 병역거부 등 ‘양심의 자유’와 관련된 사건에서 잇따라 법률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위헌제청을 했다. 그의 ‘굴곡 많은 인생’은 1985년 봄 초임 발령을 받은 인천지법에서 즉심에 넘겨진 시위 대학생들에게 무죄를 선고해 부임 6개월 만에 유태흥 당시 대법원장에 의해 춘천지법 영월지원으로 ‘유배’를 가게 되면서 시작됐다. 서울지법 동부지원 재직 시절 그는 공안 검찰로부터 ‘영장 5적’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시위 단순가담자에 대한 구속영장이나 대학가 사회과학서점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잇따라 기각했다. 1990년 5월 도로에 화염병을 던진 서울대학생 등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한 뒤 동부지원의 소장판사들과 공안검찰 사이에 커다란 대립이 있었다. 1996년 4월에는 북한에 있는 가족을 데려오려고 밀입북을 시도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귀순자 김형덕씨에게 “피고인의 행동이 국가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입증이 부족하다”며 국가보안법 무죄를 선고했다. 법복 입은 베트콩들 그는 또 현행 법률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2건의 주목받는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했다.1996년 3월에는 일반 형사 피의자와 달리 국가보안법 위반 피의자는 3차례까지 구속기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한 국가보안법 19조가 위헌소지가 있다며 위헌제청을 냈고, 서울지법 남부지원에서 형사단독 재판장을 맡았던 2002년에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현행 법규정이 헌법상 기본권인 사상과 양심, 종교의 자유와 배치될 소지가 있다며 위헌제청을 냈다. 하지만 그가 낸 2건의 위헌제청은 모두 기각됐다. 2004년 노무현 탄핵심판 사건에서 그는 노무현의 대리인을 맡았다.' 2009.5.20. 지만원 시스템클럽 대표: http://systemclub.co.kr/ 우리법연구회란? http://blog.daum.net/kimsk38/7853942 사법부의 붉은 문제아 박시환 대법관(지만원 시스템클럽 대표) 우리나라에는 이제까지 4차례의 사법파동이 있었는데 그 4차례 중 3차례를 박시환이 주도했다고 한다. 1971년에 발생한 1차 파동은 그가 사법계에 진출하기 전에 일어났고, 나머지 3개 파동은 모두 박시환이 주동했다는 것이다. 사법부 일각에서는 노무현과 동향인 박시환을 “진보 몫 대법관” “노사모 대법관”이라 부른다 한다. 사법부의 문제아인 것이 틀림없어 보이지만 문제는 그를 따르는 색깔 판사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사법파동 역사 1차 파동:1971년 법원이 시국사범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일이 잦았다. 이때 서울지검의 공안부 검사가 그 대표적인 판사의 개인비리를 조사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사건이 발생했다. 150명의 판사들은 이를 검찰의 보복조치라고 단정하고 집단사표를 제출했다. 이것이 최초의 사법파동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사태 무마에 나섰고, 물의를 빚은 검사는 문책 인사를 당했고, 개인비리를 저지른 판사는 사퇴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2차파동: 2차 사법파동은 1985년 불법시위 대학생들을 석방한 박시환 인천지법 판사를 대법원이 영월지원으로 좌천시킨 이른바 '법관 인사파동'이 발단이었다. 이에 대한 후폭풍으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1988년 2월 일부 소장판사들이 사법부 수뇌부의 개편을 주장하는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들의 견해’라는 성명을 내고, 서울·수원·부산·인천지역 소장 판사 430여명이 대법원장 선임문제와 관련, ‘법원 독립과 사법부 민주화’를 요구하는 서명에 참여했다. 박 판사는 1988년6월 김종훈, 강금실, 한기택 등과 함께 '우리법 연구회'라는 모임을 만들었고, 300여명의 소장 판사들이 김용철 대법원장의 퇴진을 압박하여 사퇴케 했다. 3차 파동: 3차 사법파동은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이후 박시환 판사를 필두로 하는 서울중앙지법 민사단독 판사들 40여명이 ‘사법부 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통해 “사법부의 자기반성 없이는 진정한 개혁이 이뤄질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법관회의 제도화를 요구했다. 당시에는 김영삼이 사상 최초로 공직자의 재산공개를 주도함으로써 부자들이 줄줄이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공직들을 떠났다. 김재순 국회의장의 토사구팽도 이때의 이야기였다. 법관들의 재산과다 보유자도 103명이나 됐고 1993년 9월 김덕주 대법원장이 대표적으로 사퇴를 했다. 4차 파동: 4차 사법파동은 2003년 서울지법 북부지원의 박시환 판사가 기수와 서열 순으로 고착된 대법관 인사 구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불거졌다. 당시 강금실 법무장관 등이 연공서열 위주의 대법관 인선에 반대한다면서 대법관 제청 자문위원회 석상을 박차고 나왔고, 당시 서울지법 부장이던 박시환이 "기대가 철저히 외면됐다"며 사표를 던져, 판사들의 '집단행동'에 불을 붙였다. 비록 서열로 추천된 김용담 대법관이 예정대로 인선되었지만 4차 사법파동으로 인해 열린 전국법관회의 이후에 전효숙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여성 첫 헌법재판관이되고, 김영란 대전고법 부장판사가 여성 첫 대법관이 되었고 이어서 박시환도 서열을 뒤집고 대법관이 되었던 것이다. 사다리 승급제를 뒤엎은 것이다. 지금 그는 5차파동을 주도하려다 다리가 걸린 것이다. 파동에 동원되는 판사들은 박시환이 만든 저쪽 오르그 사람들이라 한다. 2009.5.20. 지만원 http://systemclub.co.kr/ |
출처 : 안 티 M B C
글쓴이 : 짠짜라 고양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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