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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스타의 세계

[스크랩] 그녀가 원한것은 자살이 아니었다.

새벽이슬1 2008. 10. 12. 17:18

 

그녀가 원한것은 자살이 아니었다.

 

 

 

자살로 죽는 사람은 많건만, 왜 최진실씨의 자살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슬픔을 금치 못하는가, 그 이유는 그녀가 훌륭할 정도로 삶을 살아온 유명한 연예인이었다는 점도 있겠지만, 그보다 그녀가 연기생활 내내 보여준 밝고 경쾌한 이미지가 사실은 아닌, 그 내면에 너무나 견디기 힘든 고독, 외로움을 담왔었다는 그녀의 밝아보이던 삶의 뒤에 숨은 진실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녀는 비록 자살하였지만, 자신의 죽음 하나로 인해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착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인생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게 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착해지도록 그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누구도 하기 힘든, 일대 전환점을 만들어 놓고 갔다고 보여진다.

 

최진실을 그리 못 보내어 몸부림치며 울던 속칭 최진실사단 연예인들이 그토록 비통하게 슬퍼한 이유는 이영자, 엄정화씨들이 힘들었을 때에 나서서 최진실씨가 삶을 포기하려하던 그녀들을 북돋우고 격려해주었음에도, 정작 최진실 그녀가 힘들었을 때는 자기들이 그 역할을 대리 하여 그녀로 하여금 삶을 포기하게 된 그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못하게 막지 못하였다는 자책감에 더 울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얼마나 훌륭한가. 그녀는 타인을 위한 존재로는 기꺼이 자기를 내어주었는데 정작 그녀 자신을 위하여는 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 자살해버렸다.

 

자살은 그녀가 원한 삶이었을까? 자살로 마감하는 것, 아직 엄마 얼굴을 채 기억도 못할 사랑하던 어린 남매에게, 엄마 잃은 슬픔을 영구히 남겨주고 떠나는 것, 그것이 그녀가 원한 삶의 방식이었을까? 그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자살은 그녀가 원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누명을 벗기 원했고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의 눈길로 보아주기를 바랐고 그 무엇보다 절실히 그녀를 사랑하는 남편이 곁에 있어지기를 바란 사람이다.  이혼조차도 그녀가 원해서 되어진 이혼은 아니었다.

 

그녀가 가장 원한 삶은 그녀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되도록 덜 고통받는 삶, 아빠, 엄마가 건재하고 행복한 가정 그것을 가장 원했고 그 다음이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사랑이 여전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강호동씨가 진행하는 어느 프로그램에 최진실씨가 나와서 답변하는 것을 최진실씨 죽음 이후 방영하길래 보았는데 그녀는 답변에서 고독하다는 말, 어떤 밤에는 외로워서 운다 는 말을 남기었다. 물론 이런 고독은 남자가 있어서, 또는 남편이 있어야 해소되는 그런 외로움의 차원은 아니다.  그녀가 생의 절대적인 고독, 홀로 걸어야 하는 삶이란 그 인간이란 운명의 절대적 고독을 절실하게 느끼어 한 대답이다.

 

그러나 이미 절대적 고독을 매일매일 과중하도록 느끼며 겪고 사는 그 사람에게 허위 중상모략이라는 수치감까지 안겨주는 일이란, 그녀가 이미 진 삶의 무게에다 더 무거운 것을 덜커덕 올려놓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 무거운 것을 내려놓고 싶었는데, 그리하여, 어린 자녀들 앞에 떳떳한 엄마로서 운동회에도 같이 가기를 바랐는데, 순간, 그녀는 자살해 버린 것이다. 그녀는 진정으로 원한 것을 한 것이 아니라,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저지른 것이고 그것은 자살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어 버렸다.

 

바울사도가 쓴 로마서신에는 이런 귀절이 나온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이해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은 실천하지 못하고 오히려 내가 혐오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7:15]  

 

그렇다. 최진실씨는 그녀가 정말 원하던 일은 실천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녀가 가장 싫어하고 하고 싶지 않던 일을 저질러버린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왜 자살했는지 정답이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자기 아이들과 오손도손 잘 사는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사채업자라고 누명씌운 그 누명을 자기 아이들이 알고 자신을 밉게 여길까봐 두려워했다. 그녀는 사랑받고 싶었는데, 그 사채괴담이 자기로 하여금 마지막 남은 자기 자녀들에게서조차 누명당하고 멸시받게 만들까봐 두려워한 것이다. 

 

이것이 그녀의 죽음에서 나를 가장 안타깝게 하는 일이다. 그녀는 두려움으로 실수를 저질렀고 그 실수란 자기 스스로 자기 목을 매여 끊는 행위였다. 그녀 생애 중 가장 잘못된 선택이고 가장 어리석은 일이며 아마 그녀 자신도, 바울 사도의 로마서7장15절 말씀 처럼,  가장 혐오하는 그런 행위, 자기가 원치않던 일을 해버린 것이다.

 

인생은 결국 순간 순간의 선택들이 계속 이어지며 이어지는 길이다.  나의 경우처럼, 블로그에 글 아니 쓰겠다 고 선언해치웠다가 추후 그것이 실수였구나 깨닫고 슬그머니 다시 쓰는 일은 실수회복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치명적이 아니지만, 목숨을 해치우는 일은 치명적이고 우리로 하여금 돌이킬 수가 없게 만든다. 그 이유는 목숨은 재생가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생가능이 아닌 것은 제발, 해치우지 말라. 이것이 내가 블로그 중단 선언해놓고 다시 글을 써야 하는 이유이다. 목숨은 단 한개다.  인생도 단 한개다. 헌데 사람들은 인생에 흔한, 돈 같은 것은 귀하게 여기면서, -- 남녀사랑도 마찬가지다. -- 목숨, 인생 같은, 단 한 개 뿐인 것들, 부모라든지, 자녀라든지 그런 오로지 단 하나이고 유일한 것들에 대하여는 가볍게 여긴다. 

 

남녀의 사랑은 유일하지 않으며 돈도 유일하지 않다. 허위누명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에 부디 목숨들을 걸지 말라.

 

최진실씨는 그녀가 원치 않던, 어쩌면 가장 원치 않았을 그런 일, 선택을 저질렀다. 해치웠다. 우리는 너나없이 대개는 자기가 원한 일은 하지 않고 원치 않는 일, 하지 않았어야 할 실수를 하는 데는 잽싸고 용감하고 과감하다. 

 

진정한 용기는 내가 원하는 그 일을 하는 데에 용기가 있다. 내가 원치 않는 일을 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어리석음, 무모함이다.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우는 자기 자녀들을 보면서 최진실 그녀도 지금 쯤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 원치 않은 일을 해버렸다는 것, 판단을 그르쳤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인생에는 얼마나 후회가 많은가. 돌아보면 온통 하였어야 할 일들보담은, 하지 말았어야 할 일들 투성이다.  최진실씨는 그런 목록, 실수한 일들 목록에다 '자살'이란 한개를 더 얹은 것이다.

 

지난 주일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면서 내내 나는 울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이유는, 그녀가 한 선택이 너무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조금만 견디면 되었을 것을, 그것을 견디지 못한 그녀의 연약함이 가슴 아팠다. 그리고 그녀의 가엾은 영혼이 부디 천당에 가고 안식을 얻게 되기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목사님의  설교 말씀 중에서 들려온 것이  바울 사도의 로마서에 나온 위의 인용 말씀이다. '나는 원하는 일보다 내가 원치 않은 일을 하므로.'

 

그 순간, 깨달았다. 아, 그녀는 천국에 갔구나. 그녀의 영혼을 위해 하염없던 나의 마음에 주님께서 주신 응답이로구나.했다.  주님께서는 그녀가 한 그 일이 그녀가 원하여 한 범죄가 아니라, 자기도 이해 못하면서 부지불식 간에 저지른 실수 라는 점을 깨닫게 하여 주셨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녀 처럼, 원하는 일, 바람직한 일은 거의 안하고, 못하고, 반대로  원치 않는 일, 심지어 우리가 평소 혐오하는 일까지도 능히 저지르는 인간들,죄인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셨다.

 

우리들은 모두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가 원하지 않던 그 일을 하는데 더 열심이다. 이것을 주님께서 가르쳐주셨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로 죽으셨다.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죄에 매여 우리가 원하고 건설적인 그런 일을 하기 보다 실수투성이, 오류투성이에 더 가깝고 허구에 사로잡히기 더 쉽다. 견디려하기 보다는 화를 더 잘내고, 사랑하기보다는 미워하기에 더 열심이다. 만들고 창조하기보다는 때려부수고 살인하고 파괴하기는 더 잘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신 목적은 이런 우리들, 망치기 잘하고, 원치 않는 일을 하기에 더 열심인 우리들에게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 이 점은 최진실이란 한 가련한, 불쌍한, 엄마로서는 낙제점이 되어버린,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버린 그녀, 온 국민이 슬퍼하고 애통하는 그 최진실에게도 마찬가지다.  주님은 최진실에게도 마찬가지다.

 

본어게인 한 기독교인이라 하여 실수를 하지 않을 수는 없으며 본어게인 한 기독교인들일 수록 오히려 원치 않는 일을 하는 때가 더 많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것, 베드로가 로마를 떠나려 한 것도 그런 실수에 속할 것이다.

 

나는 이제 주님께서 최진실을 가련한 한 마리 양으로 당신의 품에 안으셨으리란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 분께서 예배 중 내내 눈물 흘리던 내게 문득 들려주신 바울사도의 그 말을 통하여 나도 너도 최진실도 모두 주님 보실 적엔, 원치 않는 실수나 잘 질러대는 어리고 약한 양들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우리의 자녀들이 원치 않는 일을 얼결에 저질렀을 때, 그리하여 부모 눈치를 볼 적에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그들을 혼내기 보다 포옹하고 위로하여 주는 일이다.  야단치고 혼냄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영영 우리 곁을 떠나게 하지 말라.  그들도 연약하겠지만 우리 모두도 결국 연약한, 한없이 죄에 무력한 존재들이다. 

 

최진실씨는 우리를 착하게 만들었다. 우리로 하여금, 고통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구원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얼결에 실수했지만, 주님은 그것 조차도 선하게 쓰실 것이란 점을 우리는 잊지 말자.

 

삶은 끝없는 가슴아픔, 끝없는 실수, 오류의 연속이지만, 그 곁에는 우리가 원치않는 짓을 저지르고 마는 한없이 연약하고 미련한 존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는 주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시다.  최진실은 죽어가는 순간, 자기 실수를 깨닫고 곁에 와계신 주님을 향해 손을 내밀었을 것이고 주님은 받아주셨을 것이다.  최소한 먼 후일, 천국에서 그녀의 그리도 사랑하던 자녀들과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도 마지막 순간에는 그녀는 엄마로서 현명한 선택을 하였을 것이다. 

 

아아, 우리는 얼마나 원치 않는 일하기에 더 잘하며 더 용감하며 더 능숙한가. 최진실씨의 죽음이 나의 가슴을 치는 이유, 그래서이다. 그녀는 그저 원치 않던 것을 그 순간 해버렸고, 저질렀고, 일이 그리 되어버렸다. 

 

누군가가 이 글을 읽으시거든, 최진실씨의 자녀들에게 나중에라도 그것이 엄마가 원해서 그들 곁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고, 원치 않고 미워한 일이었는데 그냥 실수로 그리 되어버렸다고, 그러한, 일이었다고, 그렇게 떠난 엄마를 용서해주라고 말해주시길 바란다.

 

그리해서 그녀는 죽음으로 말한다. 원치 않는 일인지 아닌지 분간해서 하라고, 원하는 일을 하라고,아직 살아있을 때에,   원치 않는 일은, 술김에라도 저지르지 말라고, 아아, 우리는 얼마나 연약한가고,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그녀가 원한 것은 자살로 마감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그 후에는 울어도 돌아올 길이 없다고,

 

2008.10.7. 파아란 한은경.

 

    

 

 

출처 : 파아란홈
글쓴이 : 한은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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