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우스노미야-김일성 커넥션 |
손충무가 쓴 김대중 X-파일은 김대중 연구의 효시가 되었으나, 한국독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
[2007-04-01 16:25: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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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천(원광대 교수)
97년 대선직전 손충무가 쓴 김대중 X-파일은 김대중 연구의 효시가 되었으나, 한국독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김대중의 정치재개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면서 손충무의 김대중 X-파일을 재독하여 김대중-우스노미야-김일성 한일북을 오고간 3각좌파 커넥션을 다시 되돌아본다.
I 김대중의 正體는 과연 무엇인가?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기에 대부분의 독자들은 우문(愚問)으로 인식할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그의 영원한 라이벌인 박정희만큼 다양하고 복합적이고 극단적이다.
얼핏 보기에, 그는 전직 대통령이고,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자랑스런 한국의 정치인이자,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그러나 보수우익에게는, 그는 한국사회를 본격적으로 좌경화시킨 인물로서 남한내의 친북좌익의 총사령관이며, 어느 날 갑자기 홍두깨처럼 등장한 노무현이라는 사상과 능력에서 함량미달인 정체불명의 정치인을 여론조작과 정치공작을 통해서 권좌에 오르게 하여 오늘날의 총체적 위기를 가져오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로 刻印되어있다.
김대중에 대한 일반적 국민의 기대와 환상이 무너진 계기가 된 것은 2000년 6월 그의 평양방문에서 비밀리에 김정일에게 4억5천달러 이상의 막대한 달러를 외환은행을 통해 갖다 바친 것이 몇 년뒤에 백일하에 들통이 나면서였고, 그 뒤 그의 인기는 急轉直下되었다. 또 작년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연이어 10월 북핵 실험을 목도하면서, 햇볕정책이란 구실하에 막대하게 퍼부은 대북원조와 핵 개발에 든 막대한 돈이 남한에서 퍼준 것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혹이 증폭되면서 김대중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눈덩이처럼 커졌다.
여기에 다가, 작년에 출간된 조갑제의 『김대중의 정체』(2006.3)가 시중에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는데, 그 책을 읽으면, 해방이후부터 끈질기게 나돈 김대중의 사상의혹에 대한 무성한 소문에 대해서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로 밖에 김대중에 대해서 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책은 김대중의 사상과 그의 의혹에 찬 평생의 이력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II 김대중에 대한 사상검증은 97년 가을 『한국논단』의 발행인 이도형 씨가 대선주자들을 초청하여 대토론회를 가졌으며, 그해 대통령선거 직전에 한 언론인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현재 미국에 망명중인 국제칼럼니스트 손충무가 쓴 『김대중 X 파일』(새세상출판사, 1997)은 한국언론인에 의한 본격적인 김대중 연구에 대한 효시(嚆矢)로 기록될 것이다.
이 책의 큰 특징은 김대중과 북한의 김일성과의 관계를 일본의 거물급 정치인 우스노미야 도쿠마 의원을 통해서 집중적으로 파헤친 책인데, 97년 대선정국을 앞두고 서울 서점가에 유포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선거의 판세에 결정적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손충무의 고백에 의하면, “박지원이 거액의 뭉치 돈을 싸들고 와서 출판을 못하도록 사정사정했는데 자신을 그 청을 완강히 거절했다”고 전한다. 결국 이 책으로 인해 저자 손충무는 김대중의 집권이후 명예휘손죄로 걸려들어 감옥소에 갔으며 나중에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손충무는 경남 하동 출신으로 63년 경향신문 기자생활을 시작하면서, 김대중과의 근 30년간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3번이나 김대중을 살려주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오랫동안 취재를 해 오면서 김대중, 김영삼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 그가 후일 김대중의 치명적 약점인 사상문제를 고발하는 책을 쓰게 된 계기도 참으로 기구하다.
『김대중의 X-파일』이 나오게 된 기원은 79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이후 그해 11월 정승화 장군이 최초로 손충무에게 김대중 비밀자료를 보여주었고, 그 뒤 7개월뒤 광주사태때 전두환 장군도 그와 대동소이한 김대중 비밀자료를 손충무에게 한번 一讀케 함으로써 김대중에 대한 사상 의문이 들게 한데서 출발하였다.
그 자료는 김일성이 우스노미야 도쿠마 의원을 단장으로 한 일본 자민당AA소속 국회의원들과 대화 내용인데, 1974년 8월 9일부터 10일까지 이틀 동안 세 차례에 걸쳐서 13시간의 마라톤 회담을 가졌다. 김대중 납치사건(1973.8.8)이 일어난 지 꼭 일년 뒤의 일이다. 장소는 평양시내 북쪽 대동강변 숲속에 있는 김일성 별장에서 이루어졌으며, 김일성은 우스노미야에게 김대중을 일본에 내보내고 대통령에 당선시키는데 노력해 달라고 부탁하는 비밀회의 자료였던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우스노미야 도쿠마 의원은 김일성 주석이 가장 신임하고 있으며 일본과 북한간의 架橋역할을 담당했으며 일본의 親北韓 窓口로 알려진 거물급 정치인이었다. 1952년부터 정계에 들어가서 첫 衆議員 당선이후 10연속 당선되었으며 김일성 주석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우스노미야 도쿠마 의원은 73년부터 94년까지 노령으로 정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21년동안 일본에서 김대중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때는 김대중 구출위원회를 설치, 최고 지휘자로서 활약해 왔다.
우스노미야가 김대중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72년 11월이었다. 김대중은 교통사고 치료를 위해 동경 게이오대학부속 의과대학 병원에 입원중이었다. 김대중을 만난 우스노미야의 회상은 이렇다. “그는 북한과의 긴장완화에 대해서 열심이었으며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도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에 일본이 경제지원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지원해 주는 돈이 국민을 위해 쓰여지지 않고 부패한 정권을 위해 쓰여지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이 참석하는 산타바바라회의에 함께 하기로 합의했다.”(김대중의 X-파일, p.325). 그는 64년부터 북한을 방문하기 시작하여, 92년까지 10회 이상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김정일을 만났고, 그 사이 김대중과도 수 차례 만났다.
김대중 납치사건이후 76년에는 의원직을 버리고 자민당을 탈당했다. 그후 무소속으로 참의원에 당선될 정도로 막강한 정치력을 갖고 있었다. 우스노미야의 부친, 우스노미야 타로는 1918년 7월 24일부터 1920년 8월 15일까지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지냈으며, 후일 육군대장이 되고 참모총장직까지 오른 유명한 장군이다. 우스노미야의 부친이 조선에서 일본군사령관 시절의 기간은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서 수십만의 조선인들이 살해당하고 수십만이 감옥으로 끌려가서 고통을 받았던 시절이었다.
III 지미 카터와 레이건의 도움, 그리고 김대중을 구출하려는 손충무와 문명자의 노력, 거기에 전두환의 결심으로 사형수에서 형집행정지자로 결정되어 1982년 12월 23일 워싱턴으로 망명한 김대중은 1985년 2월 8일까지 다시 귀국할 때까지 손충무와 거의 1주일에 한번씩자주 만났다. 김대중이 미국에 망명중에 있는 동안에도 손충무의 뇌리에서는 정승화, 전두환이 보여준 김대중에 대한 X 파일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1984년 2월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온 일본 거물 정치인 우스노미야 참의원이 워싱턴을 방문했다.
그는 김일성의 친서를 가지고 워싱턴을 방문하여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을 비롯, 레이건 정권의 고위층을 만났다. 또 김일성의 메시지를 국무부에 전달했다. 또 워싱턴 근교의 아파트에 머물고 있는 김대중씨를 방문, 몇 시간동안 회담했다. 그 뒤, 김대중은 두 차례 더 우스노미야를 만났다. 동경으로 돌아간 우스노미야는 다시 평양을 방문, 김일성을 만났다. 손충무는 우스노미야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그와 인터뷰했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손; 혹시 워싱턴에 오기 전에 일본 정부의 메시지나 북한의 김일성으로부터 전달받은 메시지는 없었는가?
ㅇ얼마 전에 평양을 다녀왔는데 북한은 한반도 평화문제를 미국과 논의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공화당 정부는 과거 민주당 정부처럼 북한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손; 기자는 지난 79년과 80년에 한국 정부의 고위층으로부터 우스노미야 선생께서 북한 김정일 주석의 부탁으로 김대중 씨를 지지하고 후원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사실인가?
ㅇ나는 김일성과 몇 차례 만났다. 국제문제를 논의하다 보면 자연히 아시아 문제가 나오고 한반도 문제가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김대중 선생에 대한 이야기도 나올 수밖에 없다. 김 주석께서는 김대중 선생의 투쟁과 그 용기를 칭찬하셨으며 한국의 독재 군사정권에 대해서 비판했을 뿐이다(『김대중의 X-파일』, p.237-38).
우스노미야와의 인터뷰를 통해 손충무는 김일성의 김대중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그것을 정승화와 전두환이 보여준 김대중 X-파일이 있다는 것이 거짓이 아님을 재확인해 주었다. 그후 손충무는 일본을 여러차례 왕래하면서, 김대중 X-파일 자료를 찾아 나선 바 1995년, 일본 국회도서관에 묻힌 <金日成-宇都宮 德馬 會談>이라는 제목을 찾아내었다.
의문이 든 지 꼭 16년째였다. 문서 번호는 A-76 45 1041651이고 자료의 발행처는 자민당 아시아, 아프리카 문제연구회 조선문제소위원회이며 발행 날짜는 1974년 10월로 되어있다. 이 보고서는 이미 마이니찌 신문이 입수하여 74년 8월 21일 1면 톱 기사 「김일성 주석 우스노미야에게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3일동안 3회에 걸쳐 편집국장 이또 마사오(伊藤 正雄)이 직접 쓴 특종기사였다. 그 가운데 김대중에 관한 부문은 8월 22일과 23일자에 언급되어 있었다.
―8월 22일자 보도 대화 첫날 우후 회담 때 나온 김대중 씨 문제―
ㅇ김일성―우리는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할 경우 상징적인 군대는 잔류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점을 직접 대화하여 명백히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민청학련사건, 지학순 주교사건은 우리와 관련이 없습니다.
김대중 씨에 대해서는 솔직히 그의 주장은 올바릅니다. 그의 슬로건도 좋습니다. 정직히 말해 우리는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ㅇ우스노미야―그러나 박정희는 “내가 아니면 혼란이 일어난다. 그렇게 되면 북한이 침략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ㅇ김일성―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는 미국에게 전달했습니다. 우리는 남쪽에 대해서는 손을 대지 않겠다.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간섭하지 않겠다. 미국이 남조선에 진보적인 인물(김대중)을 고른다면 우리는 적극 환영한다고 미국이 보낸 조선사람(재미교포)을 통해 전달했습니다.
ㅇ8월 23일자 보도. 마지막날 세 번째에 나오는 김대중씨 문제 논의;
ㅇ우스노미야―미국은 박정희 정권에 대하여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한 체질을 고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ㅇ김일성―미국이 압력을 넣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ㅇ우스노미야―대단히 잘 알겠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일본의 태도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ㅇ김일성―가능성은 없습니까?
ㅇ우스노미야―솔직히 말해 미국이 변하지 않으면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과 대화를 하려고 하고 있지만....그런데 나는 김대중 씨에 대해 개인적인 우의(友誼)도 있기 때문에....어떻게 해서든 살려서 밖으로 나가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주석께서는 무슨 의견이 없으신지요?
ㅇ김일성―매우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와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그의 주장은 올바르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선생의 노력이 성공하여 그가 외국으로 나갈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일을 환영합니다. (손충무,『김대중의 X-파일』, pp.268-269)
한편 우스노미야는 다음 해인 75년에도 평양을 방문했으며, 80년 5월 김대중이 신군부세력들에 의해 광주사건 배후 인물로 체포, 사형선고를 받은 후에도 평양을 계속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회담했다. 그 때마다 김대중 문제가 논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 시기 일본과 미국에서는 일본 한민통, 미주 한민통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김대중 구출운동을 벌렸다.
우스노미야는 한민통 기관지 『민족시보』와 조총련 기관지 『조선시보』에 김대중 구출과 김일성 주석과의 대화 내용을 기고했으며, 자신이 발행하는 잡지 『軍縮』을 통해서 남북문제와 김대중 문제를 계속 집필 보도하여 일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심지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여 많은 돈을 들여 매일신문 등에 김대중 구출운동 광고를 한 페이지씩 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자금출처에 대해서 많은 의구심을 갖도록 만들었으며 비난도 받았다.
III 우스노미아와 김일성과의 세 차례에 걸쳐 회담했는데, 1차 회담에서는 김대중에 관한 언급은 그리 많지 않다. 1차 회담에서 김일성은 평양을 방문했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과의 회담 내용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는데, 이후락에게 제안한 세 가지에 대해 우스노미야에게 설명했다. 김일성은 “첫 번째는 자주적 통일, 둘째는 무력을 말고 평화적으로 통일하자. 셋째는 민족적 대단결에 의해 통일하자” 등을 이후락에게 제한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김일성의 통일방안은 2006년 6월 한국의 대통령이 된 김대중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합의한 6.15공동선언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는 점이다. 1차 회담에서 김일성은 박정희의 통일의지에 대해 깊은 불신감을 드러내었으며, “부정부패에서 장개석을 능가한다”고 박정희를 비난하면서, “우리는 남침하는 일 따위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대화에 의해 통일하자. 전 민족회의를 열자. 각회파, 정당, 김대중 등도 포함하여 대화하자고 말하는 것이다.”(『김대중의 X-파일』, p.280)고 덧붙였다.
두 번째 회담부터 김일성은 점차 김대중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킨다. 1974년 8월 9일 하오 5시부터 밤 10반까지 무려 5시간반의 마라톤 회의였다. 2차 회의의 주요 내용은 김대중의 대북정책이 김일성의 그것과 너무 대동소이하고 김대중이 외친 대북정책을 김일성이 모두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했다는 점이다. 한국민주화의 기수이며 진보적 정치인으로 세계에 알려진 김대중이 부르짖으며 외친 ①향토예비군법 폐지, ②베트남 전쟁의 한국군 파병 반대, ③국가보안법 폐지, ④한반도 4개국 국교수립 등의 정책은 북한이 가장 원하는 정책과 일치하였다. 2차 회담 내용 중에서 김대중에 관해 언급한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김일성은 김대중은 만난 적이 없으면, 그를 지원한 적도 없지만, 그의 정책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만약 남쪽에서 김대중과 같은 진보적 인물이 정권을 잡으면 환영한다고 말했다.
ㅇ김일성―우리는 남침하지 않는다. 이것은 보증할 수 있다. 스파이를 보내지 않는다. 이것도 보증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나는 것, 이것에 대해서는 보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억압이 있으면 혁명은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민청학련, 지학순 주교는 우리가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이다. 김대중도 그렇다. 우리는 김대중과 만난 적도 없고, 원조한 적도 없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그의 슬로건도 좋다. 평화의 슬로건이다.
남쪽의 향토예비군을 중지한다. 남베트남에서 철수하라. 일본과 미국 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소련과도 국교를 가진다. 정보정치를 중단한다(는 등 김대중의 주장-역자 주). 모두 좋다고 생각한다. 유일하게 우리와 다른 것은, 미군의 철수에 대해서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도 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그의 성명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인이다.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올바르다고 판단했다.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는 그에게 기대를 걸었다.
남쪽지방에서 그는 신망을 얻었다. 그의 얼굴이 잘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슬로건이 좋기 때문에 인기를 얻은 것이다. 이것에 의하여 남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올바른 선거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는 이겼을 것이다. 김대중이 이겼다면 지금과 같은 사태로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부터 박정희는 김대중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박이 남북이 대화를 자신을 위해 이용한데 불과하다고 말했는데, 그의 주장은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ㅇ우스노미야―박정희는 자신을 대체하면 혼란이 일어난다고, 그렇게 하면 북이 쳐들어 온다고 말한다.
ㅇ김일성―미국이 우리 쪽으로 보낸 조선인이 넌지시 말하고 있는 일이다. 그 점을 미국이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을 사실이다. 우리는 미국이 보낸 조선인에게 말했다. 우리는 남쪽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간섭하지 않는다.
미국이 진보적인 인물을 선택하면 우리는 환영한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남조선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잡을 정세는 아니다. 진보적인 사람, 평화통일을 바라는 사람, 군축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좋을 것이다.
군축을 해서 남도 10만, 북도 10만이 되면, 우리는 지금도 스스로 군대를 유지하고 있지만, 남도 스스로 유지할 수 있게 된다. 38도선에서는 군대를 두지 않는다. 거기에는 경찰만 둔다. 군대는 외세에 대해서만 향한다. 이러한 진보적인 인물이 권력을 잡아야한다....
3차 회담은 8월 10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진행되었다. 김일성은 우스노미야에게 김대중의 구출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미국과 일본 측이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해서 김대중을 해외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ㅇ우스노미야―나는 김대중에 대해서 개인적인 인정이 있기 때문에, 어쨌든 살려서 바깥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일에 대해서 의견이 있는가?
ㅇ김일성―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제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그의 주장은 옳다고 판단한다. 선생의 노력이 성공되어, 그가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우리는 환영한다. 우스노미야 선생과 나와는 10년전부터 친구였다. 선생과 김대중도 친구가 되었다. 세 사람의 이러한 관계가 가능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외국인이 오래 체류할 수 없는가?
ㅇ우스노미야―6개월이다. 한번 밖으로 나가 비자를 갱신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스노미야는 급히 북한을 떠나야 했는데, 동경에서 열리는 한반도 문제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 세미나는 우스노미야가 회장으로 있는 아시아, 아프리카 연구회가 주최하는 것으로 미국의 영향력있는 정치인들과 학자들이 참석하는 세미나였다. 우스노미야는 이 세미나를 알차게 준비하기 위해서 김일성의 의견을 전하기 위해 급히 평양을 방문했던 것이다. 김일성은 우스노미야를 위해 북한 특별 비행기를 제공하여 러시아 하바로스크의 극동 해군 기지에 도착, 다음날 모스크바에서 동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도록 배려한 극진한 정성을 보였다.
IV 김일성은 북한의 일급 비밀 사항은 물론 자신의 가슴속 깊은 곳에 숨겨놓은 것까지 털어놓았으므로, 우스노미야와 김일성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일본으로 돌아 온 우스노미야는 한반도 문제 세미나에 참석하여 김일성과의 회담 내용에 대해서 미국에 전달할 수 있는 사항은 모두 전달했다. 그 사항 가운데는 ① 김일성은 미국과의 대화를 원하고 있으며, ② 한반도의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싶어한다. ③ 남한의 박정희 정권과 미국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김대중을 남한의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라. ④ 김대중이 남한의 대통령이 되면 남한에 스파이를 보내지 않고 남한 침략을 중지하겠다는 중요한 내용이었다.
한편 일본 정부에 대해서는 ① 김일성은 일본과의 국교를 원하고 있으며, ②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바라고 있다. ③ 북한의 경제부흥을 위해 일본이 경제원조를 해주기를 바라고 있으며, ④ 북한의 경공업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공장 시설을 판매해 주며, ⑤ 남한이 납치해 간 김대중을 일본으로 다시 원상회복시켜 달라. 그리고 ⑥ 김대중을 일본에 장기 체류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구하는 사항 등을 일본 총리에게 전달했다.
우스노미야 도큐마는 평양에 남아있던 일본 의원 방문단이 동경으로 돌아온 후 김일성과의 회담기록을 정리, 일본 국회와 정부에 對外秘 보고서를 제출하여 북한, 일본, 미국 3국간 사이의 주요한 메시지 전달자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김대중 납치사건을 일본정부가 한일외교에서 가치있게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으며, 북한으로 하여금 일본과 미국에게 큰소리 치면서 외교전략을 펼칠 수 있도록 북한에게 유리한 자료를 제공하여 북한과 일본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우스노미야와 그 일행의 김일성과의 회담 때문에 한국의 박정희 정권은 한미간, 한일간 외교에 상당한 고초를 겪었으며 굴욕적인 외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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