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지키자 ! 대한민국!

김형석의 100세 일기-손녀에게 알려주고 싶은 두 미국인 본문

시·감동·좋은글

김형석의 100세 일기-손녀에게 알려주고 싶은 두 미국인

새벽이슬1 2020. 11. 2. 09:05

[김형석의 100세일기] 손녀에게 알려주고 싶은 두 미국인

[아무튼, 주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일러스트= 김영석

강원도 양구 ‘철학의 집’ 내 전시관에는 두 미국인의 사진이 걸려 있다. 나와의 관계를 모르는 이들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

 

한 사람은 미국 선교사이면서 숭실전문학교 학장이었던 E.M. 모리(Mowry·1880~1971) 목사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10여 년 동안 많은 사랑을 베풀어 준 은인이다.

 

그는 생물학 교수였으나 젊었을 때 고전음악클럽 회원으로 활동했다. 한국에 와서는 1910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찬양대(성가대)를 창설해 직접 지휘했고 부인은 반주를 맡았다. 학생 합창단을 이끌어 주기도 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교회음악 보급에 공헌했고 숭실학원은 많은 음악인을 배출했다. 내 선배였던 작곡가 김동진, 테너 이인범은 학생 시절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다.

 

3·1운동이 평양에까지 파급되었을 때 독립선언문을 입수해 등사기로 찍어낸 곳이 모리 목사의 자택이었다.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숨어들어 온 젊은이들을 보호해 주기도 했다. 그런 사건들 때문에 일경에 조사받고 구속되었다가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때 찍힌 사진을 보면 방갓을 쓰고 있어 누군지 모를 정도다. 감옥에 가지는 않았으나 19일간 구치소에서 고생했다.

 

모리 목사가 미국으로 떠날 때는 아무도 모르게 나를 불렀다. “다시 보기 어렵겠다”면서 함께 기도를 드렸다. 한국의 독립과 내 장래를 위한 기도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전날 밤에는 꿈에 나타나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할 것을 암시해 주기도 했다.

 

광복 10여 년 후에 내가 그의 편지를 받은 것은 연세대에 부임하고 얼마 후였다. 오랫동안 나에 대해 수소문하다가 연세대 교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안심과 감사의 뜻을 전해왔다. 그 긴 세월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던 것이다.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다른 한 사람인 J.H. 웨어(Ware) 교수는 1970년대 초 감리교 박대인 선교사 소개로 만난 뒤부터 30년 가까이 우정을 나눈 후배다. 미국 교수들에게는 나에 대해 “형님처럼 지내는 친구”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선교사인 부친을 따라 20세까지는 중국 상하이에서 살았다. 외모는 서양 백인이지만 정서적으로는 나와 비슷한 동양인이었다.

1972년에는 자기가 근무하는 미국 텍사스 오스틴 대학에 나를 객원교수로 초청했다. 한 학기 동안 두 가족이 함께 지냈다. 내 막내딸을 그 대학의 장학생으로 선발해 졸업할 때까지 돌보아 주기도 했다. 내 아내가 병중에 있을 때는 부부가 문병을 왔을 정도로 마음씨가 따뜻했다. 지금은 부부가 다 세상을 떠났다. 항상 내 건강을 걱정하던 친구였는데….

 

돌이켜보면 이렇게 선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인연들이 있어 역사의 별빛으로 남는 것 같다. 지금은 내 딸 부부와 외손자가 모리 목사의 고향인 오하이오에서 교수와 의사로 봉사하고 있다.

 

손녀가 친구들과 양구에 간다고 해서 내 삶의 한 모습을 알려주고 싶었다.

 

외손녀가 시집을 안 가고 있다

[아무튼, 주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일러스트=김영석

며칠 전 배달된 편지 봉투를 열었다. 내가 다녀온 적이 있는 한 교회의 여성 신도가 보내온 글이다. ‘여성이 결혼하면 고생을 하고 종종 자존심도 상하니까 결혼할 필요가 없고 독신주의가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딸과 친구들이 나누더라는 이야기였다. 딸의 얘기를 들은 어머니는 ‘2남 4녀를 키웠는데 가난했지만 온 가족이 사랑으로 고생을 함께하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는 내 강연 내용을 들려주었다고 했다. 딸이 수긍을 하더라는 사연이었다.

 

요사이는 경제적 여유가 있고 교육 수준이 높은 가정일수록 딸들이 결혼을 안 해서 걱정이다. 작지 않은 사회문제가 될 정도다. 내 동료 교수 둘도 막내딸에게 결혼을 그렇게 권하고 기대했는데 결국 결혼을 못 보고 세상을 떠났다. 그 딸들이 지금은 60대에 가까워지고 있으나 여전히 독신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 친구는 “대학원까지 다니게 한 것을 후회한다”고까지 말했다.

 

결혼에 관해서는 내 딸들도 같은 고민을 한다. 외손녀 하나는 의사가 되었는데 병원 일이 바쁘고 연구 과제가 있으니까 결혼할 생각이나 여유가 없는 것 같다. 다른 애는 명문 공대를 졸업하고 애플에 취직해 중견 간부가 되었다. 자기보다 낮은 직급의 남자 직원과 결혼하기도 그렇고 상급직 선배들은 모두가 유부남이라고 한다. 결혼 상대가 없다는 것이다.

 

내 딸들의 걱정과 초조한 마음은 더 심각해지고 있다. 얼마 전 한 딸이 전화를 걸어왔다. “아버지! 우리 네 딸은 모두 30 전에 결혼을 했는데, 이보다 더 큰 효도가 없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세요”라고 했다. 저희들이 좋아서 결혼을 하곤 나더러 칭찬을 하라는 속내 같아서 속으로 웃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부모에게는 딸들의 결혼이 효도이기는 했다.

 

어느 심리학자는 ‘정서적 안정이나 우아한 마음씨가 부족한 어머니의 성격 때문에 아버지가 겪는 고통을 보면서 자란 아들들은 자신도 모르게 여자 친구를 사귀기 힘들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아버지의 폭력이나 억압으로 어머니가 애태우는 것을 본 딸들은 아버지에 대한 공포심이 모든 남자들에게 전이되어 결혼을 주저할 뿐 아니라 동성애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어린 자녀들 앞에서는 부부 싸움도 삼가야 하고 다 자란 후에는 약간씩 공개해도 좋다는 것이다.

 

여러 가정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있다. 이기주의자는 가정이나 사회생활에 행복해지지 못한다. 사랑을 받아보지도 해보지도 못한 청소년들은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지 못한다. 어렸을 때는 사랑이 있는 가정에서 자라도록 부모와 어른들이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자녀들이 결혼을 꺼리는 것은 사랑이 행복의 원천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 사랑이 있는 고생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살고 싶다.

불교는 ‘고해와 같은 인생’이라 하지만 사랑이 없는 인생이야말로 그런 것이다.

<ㅠㄲ>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