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바깥나들이를 다녀온 어린나귀가
어미에게 달려가 호들갑(?)을 떨 듯이
자랑을 해댄다.
“엄마 엄마〜 나있잖아,
오늘 길에서 마을사람들이 나를 보더니
겉옷을 벗어 내 발 앞에다 깔아주고
큰 나뭇가지를 꺾어들고 흔들면서
큰소리로 나를 칭찬하는 거야.
엄마 아〜 정말 기분 짱이야!”
어린 나귀의 들뜬 말을 들고
어미 나귀도 흥분하듯 한층 높아진 톤으로
칭찬하듯 대답을 한다.
“그 봐〜
넌 엄마아빠를 닮아서
몸매가 예쁘니 칭찬을 하지.
네 멋진 몸매를 늘 자랑하렴. 알겠니.”
2000여 년 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들어가실 때,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에 매어둔
나귀새끼를 쓰시겠다며
겸손하신 모습으로 나귀를 타셨던
당시의 상황을(마 21:1〜9),
어린나귀 버전(Version)으로 꾸몄다.
많은 사람들이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펼치고,
더러는 앞뒤에서 따르며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를
큰소리로 외쳐대던
드라마틱한 그 현장의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들 속에서,
단지 예수님을 등에 태워드린
섬김의 도구로만 사용한 것을
깡그리 잊은 채,
어린나귀는
마치 자기를 칭찬하는 것으로 알고
들뜬 기분이었으니….
가끔 찬양을 부르고 나면
청중들로부터 박수와 환호를 받는다.
연주회를 마친 후 결과에 대하여도,
'정말 은혜와 감동이 넘쳤습니다.
나이 탓에 백발에다
깊어진 주름살에 돋보기를 꼈어도
장로님들의 모습 자체가 은혜요
큰 감동이었습니다.’라고들
칭찬의 덧칠을 해댄다.
우리의 찬양을
기쁘게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단지
찬양의 도구로만 여기심을 잊고
마치 어린나귀의 들뜬 마음 같았음을
뉘우친다.
무릇 삶의 후반전에서,
어떤 이는 연장전을 힘들게 뛰는
선수와 같은 처지라도
찬양의 도구로 쓰인다.
너나없이 나이 탓에
곧던 허리가 구부정하고,
돋보기 없인 악보가 흐리게 뵌다.
기름졌던 고음과 저음도 시들어져
길게 내려면 호흡이 짧아
도둑 숨(?)을 쉴 때가 잦은 것도,
감출 수 없는 늙음의 현상이다.
모든 게 낡았다.
남보다 잘산다고 금수저라 교만 떨거나,
찌든 삶이라서 흙수저라고 좌절할 것도 아니다.
우린 하나님 앞에
찬양의 도구로만 사용될 뿐이다.
그러다 훗날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
천국찬양대원이 되는
그 영광스러운 소망 하나를 바라보면서
고통 중에도
찬양하는 순례자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뿐이다.
다만,
이 나이될 동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재앙이자 징벌인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온 나라가 망가졌다.
특히 직격탄을 맞은 대구는
모든 게 멈춰 섰다.
전국의 교회도 폐쇄되어
우리의 찬양은 커녕,
예배모임까지 금지되는
심각한 패닉(panic/공포) 상황이 되어,
전 세계가
'코리아 포비아’(phobia)로 부르며
왕따를 시켜 실망이 크다.
4월의 총선이 코앞에 닥치니
나라가 더 시끄럽다.
‘코로나19’가 빚은
국난사태(國難事態)를 두고
날선 공방을 펼치며
자신만이
국민을 올곧게 섬길 일꾼이라며
저질스런 짝짓기로 상대당과
특정후보 비방에 핏대를 세운다.
세계최고 IT생산과
아카데미상을 휩쓴 KOREA인데,
정치는 후진성 늪에서 허우적댄다.
여‧야할 것 없이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무늬만 선량(選良)일 뿐,
양의 탈(mask)쓰고 민심마저 갈갈이 찢어
비난을 받는다.
어린나귀처럼 자랑할 게 없지만,
나이를 먹었어도 추한 꼰대로 비난 받지 않고
찬양도구로 쓰임을 감사한다.
더불어
이번 '코로나19의 도시 대구’가 겪은 고통을
사랑으로 보듬어주신 전국의 찬양동지들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잔인한 3월이 지나
부활의 4월을 맞지만,
올 상반기 계획들이 뭉개질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든다.
그래서 36년 전 창단 때부터
봉사하며 되뇌던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6:10)는
말씀이 떠올라서,
찬양하고픈
큰 머슴의 먹먹한 마음을 글로 옮기며
부활의 달 4월의 하늘 우러러
울부짖듯 외쳐본다.
"마스크를 벗고 찬양하고 싶다!”
♥ DEC150/늘 노래하는 큰 머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