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은 이인제의원이 김정일 사망 2주전에 작성하여 월간조선 2012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시대의 소명
어느 나라 어느 정권이든, 그 정권에게는 시대가 요구하는 명령, 이른바 소명(召命, mandate)이 있게 마련이다. 이승만 정권은 건국의 소명을 받들었다. 박정희 정권은 산업화를 통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라는 소명을 성공적으로 받들었다. 김영삼 정권은 문민화를 통한 민주주의 정착을, 김대중 정권은 민족화해를 통한 한반도 냉전해체를 시대의 소명으로 받들었다. 노무현 정권이 어떤 소명의식을 가지고 국가를 경영했는지, 또 이명박 정권이 무엇을 시대의 소명으로 받들고 있는지, 나는 객관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미국에서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시대적 소명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정권을 잡아 헌신한다. 링컨은 노예해방 문제로 분열의 위기를 겪고 있던 미국을 구했고,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대공황을 극복하고 전체주의가 도발한 전쟁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닉슨은 베트남전쟁의 수렁에서 미국을 건져냈고, 카터는 도덕성의 위기를 해결했다. 레이건은 리더십의 위기를 극복하고 소연방을 해체하여 지구상의 냉전을 종식시키는데 성공했다.
무릇 한 정권의 성공여부는 얼마나 투철한 소명의식을 갖고 있는지, 그 소명을 얼마나 헌신적으로 받들었는지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소명의식이 투철할수록, 헌신의 강도가 높을수록, 정권은 당대에 격렬한 비난과 저항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소명을 받든 정권만을 기억할 뿐, 적당히 허송세월한 정권을 기억하는 법이 없다.
통일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
차기 대선이 1년 앞으로 다가왔다. 매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차기 예비주자들에 관한 기사를 생산해내기 바쁘다. 연일 주자들에 대한 각종 여론조사 수치가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주자들의 인터뷰기사가 가끔 보이기는 하지만, 정치 일선에 있는 나로서도 각 주자들의 주의주장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미국도 내년 11월 차기 대통령선거가 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차기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거의 확실시 되는 오바마 현 대통령과 공화당 후보간의 여론조사는 보도되지 않는다. 대신 공화당 예비주자들 사이에 치열한 토론이 끝없이 펼쳐진다.
국민은 주권자로서 누구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기 전에 그가 누구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미국과 달리 이미지 경쟁이나 인기 몰이 식으로 대선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심지어 제도권 밖의 한 인물이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1위로 대서특필되고 있다. 그의 정치적 비전이나 포부가 공개된 일은 내가 아는 한 전무(全無)하다. 기성정치에 대한 분노, 그로 인한 정치적 허무주의가 뭉게구름처럼 확산되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허무(虛無)로써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선에 뜻을 두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비전과 포부를 밝히는 일에 용감히 나서야 한다. 매체는 그들의 정치적 실체를 국민에 알려 진정한 여론의 형성을 도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거론되는 예비주자들의 입에서 통일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들 가슴 속에 통일에 관한 담대하고 절실한 인식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여의도 정치현장의 많은 정치인들이 통일에 관해 갖고 있는 천박한 의식수준을 놓고 보면, 예비주자들의 침묵은 통일에 대한 무시(無視)이거나 무지(無知)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들 가운데 누가 대통령이 되든 차기정권이 통일을 시대의 소명으로 받들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명박 대통령이 최근 이런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통일은 도둑처럼 불시에 찾아 올 것이다.” 잠을 자는 주인이 도둑을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소명의식 없는 정권이 홀연히 찾아온 통일의 기회를 자칫 흘려보내지 않을까 걱정이다.
알렉산더 그리고 콜럼버스
기원전 4세기 동방원정 길에 오른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더는 소아시아(오늘의 터키지역)의 도시 고르디움 안에 있는 제우스신전에서 이른바 고르디우스 매듭 앞에 서게 되었다. 이 밧줄의 매듭을 푸는 자가 동방을 지배한다는 신탁(神託)이 무려 400년 동안 전해 내려왔지만, 아무도 풀지 못한 난해(難解)한 매듭이었다. 알렉산더는 거침없이 그 밧줄을 칼로 내리쳐 풀어버리고, 예언 그대로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를 융합시킨 헬레니즘문화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탐험가이다. 그는 누울 줄만 알지 설 줄을 모르는 달걀을 세울 수 있느냐고 질문하였다. 누가 달걀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콜럼버스는 탁자 위에 달걀의 모서리를 깨트려 세워버렸다. 그는 영국이 동쪽 바다를 항해해 인도대륙을 발견했으므로 서쪽으로 나아가면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인도대륙의 서쪽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믿음 하나로 목숨을 건 항해 끝에 마침내 그는 미지의 신대륙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죽을 때 까지 그 땅이 아메리카 대륙이 아닌 인도의 일부로 알았고, 그래서 지금도 그가 도달한 섬들은 서인도제도라 불리고 있다.
통일은 과연 풀 수 없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인가. 통일은 진정 세울 수 없는 달걀인가. 냉전체제에 길들여진 의식과 논리로 바라보면 통일로 가는 길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20년 전 이미 지구상의 냉전이 사라졌다. 한반도에 잔설(殘雪)처럼 남아있는 냉전을 녹일 용기와 열정만 있다면, 알렉산더가 매듭을 끊고 제국을 건설했듯이, 콜럼버스가 달걀을 내리쳐 세우고 신대륙을 밟았듯이, 우리 민족은 통일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을 것이다.
방치되는 북한 인권
인권이야말로 인류 보편의 가치로서 이는 한 나라 안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국제정치 문제이다. 그래서 세계는 북한 인권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정작 대한민국은 북한 인권에 대해 믿지 못할 정도로 냉담하다. 우리 헌법상 북한 주민은 명백히 우리 국민에 속한다. 헌법이 추구하는 최고 가치는 인권이다. 국민으로 하여금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 정치범수용소에 수십 만 명이 갇혀 참혹한 학대에 시달리고 국경을 탈출하는 주민들이 사살되는 등 생명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는 소식이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리는데, 국회에 제출된 ‘북한인권법안’을 3년째 잠재우고 있는 우리 정당과 국회의원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튀니지에서 촉발된 재스민혁명이 아랍세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혁명으로 국민을 억압하던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의 낡고 병든 독재정권들이 차례로 무너졌고, 예멘과 시리아에서도 체제붕괴는 초읽기에 들어가 있다. 재스민혁명의 성공을 뒷받침한 국제사회 개입의 명분은 다름 아닌 인권이었다. 그 어떤 정권도 국민의 인권을 유린할 수 없다. 폭압적 권력에 저항하는 국민을 살해하거나 압제와 기아(饑餓)에 시달리다 못해 국경을 탈출하는 국민에게 총을 쏘는 행동은 반인륜범죄로서, 이는 곧 국제사회의 제재에 직면하게 된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주민들의 고난에 찬 탈출행렬이 시작되었다. 대부분 중국을 통해 탈출하고 있는 이들의 목적지는 한국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들을 체포하는 대로 북한에 송환하고 있다. 송환되는 사람들에게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이런 현실을 눈으로 보면서도 역대 장권은 침묵했다. 탈북자를 한국에 보내라고 중국에 딱 부러지게 요구하고 설득하는 정권이 없었다. 현 이명박 정권도 마찬가지다. 탈북주민들의 인권은 곧 대한민국의 문제이고, 국제사회는 이들에 대한 반인륜범죄를 저지할 권능을 가지고 있다. 중국에 대한 우리의 요구는 정당하고, 중국 또한 인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시선(視線)과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통일 전 서독은 동독 탈출주민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해, 통일 직전 그 수효가 100만명에 이르렀다. 1989년 9월 30일 당시 서독 외상 겐셔(Hasns-Dietrich Genscher)는 프라하에 있던 탈동독주민 6,000명을 특별열차를 이용해 한꺼번에 입국시키기도 했다. 줄잡아 탈북자가 30만명이 넘는 오늘, 한국에 들어온 사람은 고작 2만명 남짓이고, 그나마 그들을 포용하는 정책이 소극적이어서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차기 정권은 목숨을 걸고 탈출한 주민들을 강렬한 의지로 포용하는 정책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신성불가침한 탈북주민들의 인권을 뜨겁게 포용하는 일로부터 통일의 문이 열릴 것으로 믿는다.
통일비용이라는 허상
아직도 빠른 통일에 대한 거부감 내지 부담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갑자기 통일이 되면 대한민국이 사회, 경제적으로 그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고 큰 재앙을 맞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막대한 통일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게 대표적이다. 이 정권 들어서 이명박 대통령이 통일의 담론(談論)으로 기껏 통일세를 꺼내는 것만 보아도 통일비용에 대한 시각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나온 통일비용 연구결과를 보면 그 규모는 약 3,000억 달러에서 3조 달러에 이른다. 한마디로 객관적 기준이 없다. 또한 통일비용에는 강제성이나 의무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능력범위 안에서 조달하면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누가, 왜, 통일비용이라는 공포를 만들어 우리 국민의 통일의지를 약화시켜 왔을까.
1998년으로 기억한다.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통일관련 국제 심포지움에서 당시 주한 독일대사 폴러스(Klaus Vollers)가 기조연설을 통해 이런 말을 하였다. “왜 한국 사람들은 통일비용을 두려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독일의 경우 통일비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95%는 동독지역에 대한 정부의 인프라건설과 민간 투자이고 5% 정도가 동독주민들에 대한 사회복지비 지출이다. 아직 한국의 복지수준은 높은 편이 아니므로 독일처럼 복지제도를 1:1로 통합하더라도 큰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폴러스 대사 앞에서 직접 이 말을 들었고,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공공인프라 건설이나 민간투자는 비용이 아니라 투자로서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일이지 부담일 수 없다. 통일비용에 대한 공포는 통일을 반대하는 우리 내부의 냉전세력이나 통일을 방해하려는 외부세력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실제로 통일비용을 말하는 사람들은 사라질 분단비용을 말하지 않는다. 통일은 곧 분단의 해체를 의미하는데, 분단으로 인해 강요되던 막대한 비용이 사라질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 비용이야말로 실체가 있는 비용이다. 또한 통일의 지평은 우리나라에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 줄 것이 틀림없다. 한반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고, 압록강, 두만강 넘어 옛 만주지역과 몽골, 그리고 극동 시베리아 지역과의 경제협력은 강화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논의만 무성한 두만강 삼각주 개발과 환동해 경제권 부상이 현실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이렇게 사라지는 분단비용이나 얻게 될 새로운 기회에 관하여는 침묵하면서, 객관적 기준이나 의무성도 없는 통일비용을 내세워 통일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은 기만(欺瞞)이자 위선(僞善)에 다름 아니다. 차기 정권은 통일비용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국력을 키우면서 통일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흡수가 아닌 합류
차기정권은 흡수통일이라는 개념의 유희(遊戱)에서 벗어나야 한다. 독일통일 직후부터 북한 지도부는 대한민국을 향해 독일식 흡수통일을 도모하지 말 것을 줄기차게 요구하였다. 북한의 이 요구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것이 김대중 정권이었다. 그 이후 우리사회에서 독일통일은 흡수통일이며, 한반도 통일은 남북 당국 간의 대등한 합의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인식에는 중대한 오류가 있다.
먼저 독일의 통일은 흡수통일이 아니다. 흡수는 일방이 다른 일방을 종속적으로 통합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 동독 주민들은 공산당체제를 붕괴시킨 후, 직접선거를 통해 새로운 의회를 구성하고 데메지에르(Lothar de Maiziere) 과도정부를 출범시켰다. 1990년 8월 23일 동독의회는 400표 가운데 294표의 찬성을 얻어 그때까지의 공산당통치를 불법화하고 동독을 서독기본법에 편입시키는 역사적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독일통일은 동독 주민들의 주권적 결단, 서독과의 통일조약 그리고 전승4개국(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의 동의를 거쳐 민주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서독이 일방적으로, 또 강제력을 동원하여, 동독을 흡수한 것이 결코 아니다.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여 지배종속관계에 두었다면 통일 16년 만에 동독출신 메르켈(Angela Dorothea Merkel)이 통일독일의 수상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통일은 분단체제 두 지도부의 담판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예외 없는 역사의 경험이며, 독일통일이 이를 다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동독주민들이 분단을 고집하는 체제를 무너뜨린 후 통일이라는 주권적 결단을 내렸고, 새로 구성된 동독의회와 과도정부가 이 결단을 실천에 옮긴 것이 독일통일과정이기 때문이다. 동독의 주인이 공산당이나 체제엘리트들이 아닌 동독주민이었고, 통일이라는 주권적 결단의 주체 역시 당연히 동독주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하나가 된다. 파주 교하에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되어 더 큰 강을 이루는 것일 뿐, 서로 어디에서 흘러온 물인지 묻지 않는다. 또 거기에 무슨 지배복종의 관계가 있을 리 없다. 이렇게 두 물줄기가 합류(合流)하듯이 이루어지는 게 통일이다. 독일통일도 굳이 정의(定義)한다면 흡수통일이 아닌 합류통일이다. 실제로 독일에서는 자신들의 통일을 흡수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다. 한반도 통일도 남과 북의 주인인 국민의 결단에 의해, 마치 두 개의 강이 합류하여 하나가 되듯 평화롭게 이루어질 것이다. 통일의 마당에서 차별과 보복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다.
차기 정권은 남과 북의 우리 국민, 더 넓게는 해외동포를 포함하는 민족구성원 모두가 통일을 결단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중국변수(變數)
통일을 논의할 때 의외로 중국변수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체로 중국이 한반도 통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갖고 있고, 심지어 중국이 반대하면 통일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한반도 통일에 관하여 중국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그 속내를 정확히 알기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중국 내부도 복잡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의 이해관계도 계속 변화하기 때문이다. 한 때 중국 지도자들이 한반도 통일에 관하여 중국, 홍콩처럼 두 체제가 공존하는 소위 일국양제(一國兩制) 방식을 말하기도 했지만, 적대적인 두 체제가 하나의 지붕 아래 공존하는 통일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해서인지 최근에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북한도 더 이상 고려연방제 통일방안 선전에 열을 올리지 않는 것 같다. 한반도통일은 하나의 체제 아래 통합하는 것을 의미하며, 중국이 한반도 통일에 관하여 민감하게 이해관계를 계산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반도 통일은 우리 민족의 신성한 권리로서 어떤 외국도 통일을 반대하거나 간섭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이 점은 독일의 경우와 확연히 다르다. 독일은 패전의 대가로 분할되었고,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전승 4개국의 동의를 얻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반도는 전쟁의 책임이 있을 리 없고 오직 냉전이라는 동서대결 결과로 분할되었다. 따라서 통일에 관하여 어떤 외국의 동의를 얻을 필요가 없다. 물론 중국은 한국전쟁 때 북한을 도와 참전하고 휴전협정의 당사자로 서명하였다. 거기에 러시아처럼 공산주의 체제를 해체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정치체제는 아직도 공산당 일당체제를 유지하고 있어 북한과의 정신적 유대가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북한의 주인은 북한주민이고 그들이 통일을 결단하면 중국이 이를 가로막을 어떤 근거도 없다.
나는 중국이 한반도 분단의 고착(固着)보다 통일이 중국의 이익에 더 부합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2001년 5월 서울을 방문한 중국의 전 총리이자 당시 전인대상무위원장 리펑(李鵬)이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하나의 민족이 인위적으로 분단되어 오래 가는 것은 좋지 않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한민족뿐만 아니라 이웃 모든 나라에도 이익이 될 것이다.” 이 말은 언론에도 공개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한반도의 주변정세도 변했고, 중국도 변했다. 어느 사이 중국은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움직이는 G2가 되었다. 미국과의 갈등도 확대되고 성급하게 신 냉전을 말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그러나 이런 정세변화에도 불구하고 한반도통일이 중국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사실은 불변이다. 북한이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지렛대로서 중국에 주는 이익은, 이미 중국의 세 번째 교역상대국이자 통일 이후 더 강력한 경제협력 파트너가 될 한국이 중국에 줄 이익에 비하면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핵개발을 고집하며 국제고립을 심화시키는 북한이 일본의 핵무장을 불러오는 등 오히려 중국의 안보이익에 부담으로 작용할지 모른다.
차기 정권은 중국변수에 관한 국민의 기우(杞憂)를 씻어주어야 한다. 우리사회 일부 지도층 인사들까지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중국이 군대를 보내서라도 통일을 막을 것이 아니냐는 말을 공공연히 한다. 중국이 그런 무모한 결정을 할 가능성은 제로이다. 중국은 현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일시적 혼란을 막고 통일과정을 지원하기 위한 유엔활동에 참여할 가능성이 있지만, 이는 환영할 일이지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차기 정권은 한반도 통일과 관련하여 중국의 이해와 협력을 끌어내는 일에 과감하게 나서야 한다.
일본 그리고 러시아
일본은 한반도 분단에 관한 원죄(原罪)를 안고 있다. 일본의 한반도 강점을 해방하기 위해 미국, 소련 두 군대가 한반도에 진입하였고, 그것이 분단의 도화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우리 통일에 적극 협력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 하지만 우리 국민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일본은 한반도통일을 원치 않으며 방해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실제로 일본은 분단이라는 악조건(惡條件) 속에서도 대한민국의 기적 같은 경제성장을 가까이서 지켜본 나라이다. 특히 철강, 조선, 반도체 등 산업분야에서 일본은 한국에 추월당하고, 자동차 산업까지 숨 가쁘게 추격당하는 실정이다. 만일 한반도가 통일되면 얼마나 강력한 경쟁자로 자신들을 위협할 것인지 두려워 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한반도 통일은 일본에게도 큰 축복이 될 것이다. 일본은 150년 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아시아를 벗어나(脫亞) 서구화(西歐化)의 길을 걸었다. 산업화를 성공시킨 일본은 그 힘으로 제국주의 침략에 나섰고, 한국,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미증유의 재앙을 겪었다. 패전 후 다시 일어선 일본은 반세기 가까이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군림하며 그들 의식속에 아시아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일본은 아시아의 일원(一員)으로 돌아오려 한다. 그들의 장래가 더 이상 서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반도 분단이라는 갈등구조가 엄존하는 한, 일본이 순탄하게 아시아의 일원이 되기는 어렵다.
일본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도 한반도 통일에 적극 협력해야 한다. 한반도 냉전해체는 곧 중국, 일본, 미국 등 주변 열강이 대립보다는 협력을 키우는 전기가 될 것이고, 이런 정세변화가 일본에게 새로운 출구를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후 독일이 유럽 여러 나라들에 대해 진정한 사과와 응당한 조치를 한 것처럼, 일본도 군국주의, 제국주의 침략으로 고통받은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대해 늦었지만 더 진심어린 사과와 성의있는 조치를 취해야 함은 물론이다. 이렇게 역사적 부채를 청산하고 도덕적 재무장을 하게 된다면, 일본이 아시아의 존경받는 지도국가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통일된 한반도, 부상하는 중국의 역동성과 손잡지 않고 초고령화 된 일본사회가 갈 길은 없어 보인다.
러시아는 한반도 통일의 가장 큰 수혜자(受惠者)가 될 것이 분명하다.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주, 사할린주 등 극동시베리아에는 풍부한 에너지자원과 농업자원이 있다. 통일한국은 이 자원을 개발할 최적의 협력파트너가 될 것이다. 이들 지역을 포함하는 환동해 경제권 부상은 시간문제이다. 시베리아횡단철도와 한반도철도의 연결로 인한 물류혁명은 러시아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러시아의 지도자들이나 전문가들이 한반도 통일을 당연시하고 큰 기대를 표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푸틴(Vladimir Putin) 러시아 수상은 그가 대통령이던 2001년 3월 모리(森 喜朗) 일본수상과의 이르쿠츠크 정상회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반도는 예상보다 빨리 통일될지 모른다. 통일된 한반도는 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다.”
차기 정권은 한반도통일에 관하여 일본과 러시아의 긍정적 역할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의 역할
독일통일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미국이다. 동독주민들이 베를린장벽을 허물고 통일을 열망할 때, 전승4개국 가운데 영국과 프랑스는 내놓고 반대했다. 당시 대처(Margaret Thatcher) 영국수상은 독일이 통일되면 유럽의 일본이 된다며 격렬하게 반대했고, 미테랑(Mitterrand) 프랑스 대통령도 이 주장에 맞장구쳤다. 당시 소련의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대통령은 침묵하고 있었다. 이들을 설득하여 통일을 지지하도록 만든 사람이 바로 부시(George Bush)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다. 미국의 이런 역할이 없었다면 독일통일은 어떤 험난한 과정을 거쳤을지 모른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탄생과 안보 그리고 경제성장에서 부정할 수 없는 제1의 동반자이다. 최근 비준된 한미FTA를 통해 한미동맹은 군사로부터 경제로 한 차원 더 발전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한반도 통일은 우리의 염원이자 미국의 국익에 부합함은 물론이다. 우리가 현실적인 통일과정에 진입했을 때 미국의 역할은 독일통일의 경우와 똑 같진 않겠지만, 그 중요성은 뒤지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중국, 일본, 러시아는 물론 EU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한반도 통일을 지지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중심적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김대중 전 대통령은 공식 발표되지 않은 김정일 위원장과의 대화내용을 소개했다. 그는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해온 김정일에게 주한미군이 오히려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에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통일 이후에도 미군이 한반도에 계속 주둔할 필요가 있다고 설득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정일도 자신의 주장에 공감을 표했다고 흡족해했다.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이 말을 몇 차례 반복해서 직접 들었다. 아직도 우리사회에는 한미동맹해체와 미군철수를 주장하고, 그래야만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차기 정권은 미국과의 동맹을 더 굳건히 하고 통일에 관하여 미국이 긍정적이고 중심적인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
재앙이 아닌 축복
독일통일은 우려하던 이웃 나라들에게도 축복이 되었다. 통일 이후 독일은 대처나 미테랑의 우려를 비웃듯이 더 존경받는 나라가 되었고,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프랑스와 함께 EU를 출범시켜 화폐통합까지 이루어냈다. 현재 몇몇 나라들의 부도위기로 유로 존(Euro Zone)이 흔들리고 있지만, 독일이 유럽경제의 기관차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유럽을 전쟁의 공포로 몰아갔던 독일이 아니라, 경제위기를 앞장 서 극복하고 유럽의 번영을 이끄는 독일은 바로 통일이 가져다 준 축복일 것이다.
통일 당시 야당이던 사민당은 즉각적인 통일을 반대하였다. 혼란으로 인해 동?서독 국민 모두에게 고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통일 이후 서독 국민들의 소득은 감소한 일이 없다. 오히려 인플레를 우려한 정부가 긴축정책을 써야만 했다. 동독지역 주민들의 실질소득은 가파르게 상승해 10년 후에는 서독지역 주민들 소득의 90%를 상회했다. 앞서 말한 통일비용 조달을 위해 부가가치세가 조금 인상되고 사회통합세가 부과되었지만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통일은 단 순간에 이루어지지만, 사회 각 분야의 통합에는 긴 시간이 소요된다. 이 통합과정에서 독일 국민들이 겪은 고통은 통일이 가져다 준 열매에 비하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독일통일은 독일 국민 모두에게 20세기가 가져다 준 가장 빛나는 축복임에 틀림없다.
지금 우리사회는 실업과 빈부격차 그리고 노령화의 수렁에 빠져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시장의 고착(固着)이다. 인구는 정체되고 더 이상 투자할 곳이 없다. 기껏해야 해외로 나가 투자한다. 해외사업은 국내의 고용과 소득, 소비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일부 우리 글로벌 기업의 성장이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통일이 되면 국내시장이 폭발적으로 확대된다. 북한은 우리 경제 개념으로 보면 거의 백지상태이다. 우리나라 무역고가 1조 달러를 돌파했는데, 북한 무역고는 45억 달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이를 웅변해준다. 북한 지역에 대한 공공 인프라투자 수요, 민간 기업투자수요가 봇물을 이룰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거대한 투자시장이 열리고 소비시장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뜨거워질 것이다.
시장의 확대는 한반도에만 머물지 않는다. 압록강, 두만강은 더 이상 고립의 경계선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상대적으로 낙후된 중국의 동북3성 그리고 연해주를 비롯한 극동 시베리아와의 협력이 강화되고 시장은 점차 확대되어 나갈 것이다. 이 시장 확대를 통해 새로운 일자리와 소득이 창출되어 실업과 빈부격차의 공포를 벗어날 길이 열리게 된다.
특히 북한 주민들의 소득은 동독주민들보다 훨씬 빠르게 증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북한 지역에 대한 투자의 폭과 속도가 크고 빠르게 진행될 것이며, 여기에 북한 주민들의 성취동기가 더 강렬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통일이 되면 가난한 북한 주민들 때문에 우리 국민의 소득이 내려가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나 통일의 경제학에서 그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앞서 말한 대로 이는 독일통일에서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북한 주민들의 소득은 빠르게 상승하여 10년을 전후하면 남한 주민들의 소득 수준에 육박하겠지만, 남한 주민들의 소득도 속도의 문제일 뿐 계속 상승할 것이다.
세계적 투자은행 골드만 삭스(Goldman Sachs)는 2009년 9월호 세계경제보고서에서 의미심장한 분석을 발표하였다. “한국이 통일되면 30~40년 안에 국민총생산이 프랑스와 독일을 넘어설 수 있고, 일본을 추월하는 일도 가능하다.” (We project that the GDP of a united Korea in USD terms could exceed that of France, Germany and possibly Japan in 30~40 years.) 통일한국이 미국, 중국 다음의 세계 제3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결코 실현 불가능한 전망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현실성 있는 목표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분단체제 안에서 시장의 한계로 고통 받는 한국 국민들에게, 기아와 압제로 고난에 처한 북한 주민들에게, 통일은 재앙이 아니라 거대한 축복이 될 것이다. 일부에서 힘들고 고통스러운 통합과정을 두려워하지만, 통일이 빠르면 빠를수록 통합의 진통 또한 짧고 가벼워질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북한 체제 엘리트들에게도 통일은 결코 재앙이 아닐 것이다. 우선 어떤 차별이나 보복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독일의 경우에도 살인 이외의 모든 법 위반에 관하여 대사면이 단행되었다. 동독 공산당이 변신(變身)하여 민주사회당으로 활동하고 있다. 더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더 번영하고 고르게 잘사는 통일한국에서 북한체제 엘리트들도 자기혁신을 통해 더 큰 기회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통일은 그들에게도 축복이 될 것이다.
안중근, 처칠 그리고 장 모네
안중근은 1909년 일본 제국주의 심장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고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 그는 이 저술에서 놀라운 구상을 제시했다. 한국, 중국, 일본이 항구적인 평화를 누리기 위하여 ‘동양평화회의’를 구성하고, 공동은행을 설립하여 공용화폐를 사용하며 나아가 공동의 군대를 조직하자는 것이다. 무장투쟁가의 머리에서 나온 이 비전이 아시아에서는 아직도 잠을 자고 있지만, 놀랍게도 그의 비전은 전쟁으로 점철된 유럽대륙에서 실현되었다.
유럽에서는 1946년 9월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취리히에서 ‘유럽합중국’ 건설을 제창하였다. 안중근보다 37년 뒤의 일이다. 그 뒤 ‘유럽연합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의 장 모네(Jean Monnet)가 “변화의 소용돌이(A ferment of Change)"라는 논문에서 유럽연합의 비전이 더 이상 상상이 아닌 현실임을 설파하였다. 유럽 여러 나라는 EEC를 거쳐 EC로 다시 EU로 통합을 발전시켜 마침내 공동의 의회, 은행, 화폐, 군대를 갖게 되었다. 안중근의 구상이 고스란히 유럽에서 실현된 것이다.
한반도 통일은 한국, 중국, 일본을 비롯한 동북아의 통합을 촉진하는 역사적 전환점을 이룰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제 미국과의 FTA를 끝낸 한국이 중국, 일본과의 FTA를 체결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세 나라의 협력관계가 긴밀해질수록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과제도 많아지게 된다. 물론 단계적으로 이루어질 일이지만, 동북아에도 머지않아 EU처럼 궁극적으로 안중근의 비전이 실현될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 이렇게 한반도 통일이 전쟁으로 얼룩졌던 동북아 국가들 사이의 역사적 비극을 종식시키고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틀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는 의미에서, 통일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아시아 모든 나라에도 축복이 될 것이다.
빙벽을 녹이면 강물이 된다
분단의 장벽은 빙벽(氷壁)과 같다. 끈질기게 뜨거운 에너지를 집중해야 녹일 수 있다. 그러나 한번 녹으면 생명의 강이 된다. 빙벽은 아무 흔적도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릴 뿐이다.
서독은 1972년 이전까지의 대결정책을 버리고 적극적인 개입, 협력, 포용을 확대하는 이른바 동방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정책으로부터 나온 내부의 에너지와 때마침 동구 공산권에 몰아친 개혁, 개방의 훈풍(薰風)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분단의 빙벽인 베를린장벽이 녹아내렸다. 사민당 브란트(Willy Brandt) 수상이 시작한 동방정책은 기민당 정권에서도 일관되게 추진되었고, 17년 뒤인 1989년 기민당 콜(Helmut Kohl) 수상 시절 마침내 통일의 마침표를 찍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대북정책은 계승, 발전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김대중 정권이 추진한 햇볕정책의 목표는 북한과의 화해와 공존이었다. 통일을 전략적 목표로 삼지 않았다. 화해와 공존을 목표로 하면 정책의 대상은 북한 당국일 수밖에 없다. 북한 주민은 부차적인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김대중 정권은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지도부가 개혁과 개방의 길을 선택할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뒤를 이은 노무현 정권도 햇볕정책을 계승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돌아 온 것은 핵실험과 무력도발이었으니 말이다.
서독의 동방정책과 비교해보면 햇볕정책의 실패원인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하나는 통일을 궁극적이고 전략적인 목표로 삼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화해나 공존은 통일로 가는 한 단계의 전술적 목표에 지나지 않는다. 또 하나는 정책의 대상이 확고부동하게 북한 주민이어야 하는데, 북한 당국만을 상대했다는 점이다. 북한 당국은 주민에게 다가가는 중요한 관문의 하나일 뿐인데 말이다. 이렇게 햇볕정책은 목표와 대상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함으로써 실패를 자초하였고, 정권이 바뀌면서 중단되는 사태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 어디에서도 절실한 통일의 목표를 찾을 수 없고, 북한 주민을 헌법상 우리 국민으로 또 함께 통일을 이룰 주인으로 상대하는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이 실패했으니 폐기하면 된다는 의미인지 도대체 알 수 없다. 종종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무슨 비밀접촉을 통해 정상회담을 추진한다고 하는데, 과거 두 정권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북한 당국의 도발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일도 미지근하기 이를 데 없다. 도발이 격화될수록 통일의 목표를 더 선명히 내세우고 빙벽을 녹일 에너지를 결집시키는 전략적 노력을 더 집요하게 기울여야 할 텐데, 그러나 이 정권에는 그런 열망과 의지가 없다.
차기 정권은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확고부동한 통일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중대한 변화가 오고 있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모든 사물이 궁극에 이르면 변화를 일으키고(窮則變), 변화가 일어나면 막혔던 것이 통하게 되고(變則通),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면 오래 지속된다(通則久)는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도 이 역경의 세계관을 차용(借用)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의 발전과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승만 체제가 장기독재로 막히자 4.19혁명이 일어났고, 유신체제가 극단에 치닫자 10.26사태가 발생했다. 신군부독재도 국민의 저항에 무너지고 마침내 민주주의 체제가 등장하였다. 철옹성 같던 아랍세계의 장기독재체제가 모래성처럼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그 기세등등했던 리비아의 카다피가 하수구 속에 숨었다 피살되리라는 것을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북한체제가 더 이상 나아갈 곳은 없어 보인다. 우상화, 선군정치, 세습제 이 세 가지가 북한체제의 특징이다. 모두 다 인류문명의 발전방향과는 상극(相剋)이다. 북한 주민들의 정치적 자유와 물질적 기초는 계속 악화되어 한계상황을 넘은지 오래 되었다. 줄잡아 300만명 이상 굶어죽었다니, 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체제만이 변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그리고 중국처럼 북한 체제엘리트들이 개방과 개혁을 통해 질서 있는 변화를 추구할 기회는 많이 있었고,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무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미국이 북한체제변화에 관하여 어떤 분석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1994년 영변 핵 위기가 터지고 제네바에서 미국과 북한이 협정을 체결할 때, 미국 정보기관들은 북한체제가 5년 안에 무너질 것으로 분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예측은 빗나가고 제네바협정은 파탄의 길을 걸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최근 미국 정보기관은 앞으로 5년 안에 김정일 정권이 무력화된다고 예측하는 모양이다. 건강문제이든 다른 이유이든 그럴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그렇다면 20대의 김정은이 성공적으로 권력을 승계할 수 있을 것인가.
최근 한국을 방문한 러시아 국제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부소장 미헤예프(Vasily Mikheev) 박사의 인터뷰 기사가 눈길을 끈다. 나도 두 차례 러시아의 대표적 씽크 탱크인 IMEMO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 일이 있다. 미헤예프는 “북한은 권력 이양 후 시장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붕괴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김정은이 불과 수년의 승계수업밖에 받지 않아 권력 이양 후 10년 안에 북한체제가 붕괴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대단히 보수적인 전망이다. 변화를 억압하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변화는 훨씬 더 빠르고 충격적으로 일어나는 법이다. 아랍세계를 휩쓴 재스민혁명의 폭풍이 이를 증명한다.
이제는 통일의 시대
이제 통일의 아침이 밝아 온다. 건국의 시대, 산업화의 시대, 민주화의 시대를 거쳐 통일의 시대가 열리는 것은 필연의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통일의 결실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민족 구성원 모두의 열망이 모아져 거대한 에너지로 폭발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차기 정권을 맡아보겠다고 나서는 사람 가운데 통일의 비전, 목표, 전략, 열정을 보여주는 사람이 없다. 앞서 본 것처럼 중국의 리펑이나 러시아의 푸틴 같은 지도자도 한반도에 통일의 여명이 밝아오는 것을 말하는데, 정작 통일을 성취해야 할 절실한 상황에 처해있는 우리 지도자들의 의식은 분단의 밤을 헤매고 있으니 이보다 더 한심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폴란드에서 공산체제를 무너뜨리고 직선 대통령을 지낸 바웬사(Lech Walesa)가 2000년 초 서울을 방문했을 때 그를 만난 기억이 새롭다. 처음 만난 나에게 그는 다짜고짜 왜 한국이 통일을 미루고 있느냐고 힐문(詰問)했다. 복잡한 한반도정세를 설명했지만 그의 따지는 듯한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평양의 체제엘리트들은 보복이 두려워 통일에 저항하고 있으니, 대 사면령을 내리고 이 사실을 비행기로 북한 전역에 뿌려 알리면 된다고 방법론까지 진지하게 제시하였다. 공산체제 안에서 처절한 투쟁을 통해 민주체제를 세운 행동주의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지난 해 미국 랜드 연구소의 한반도 전문가 베넷(Bruce Bennett) 박사가 국회 포럼에서 발표한 통일전략 가운데 북한 체제엘리트들에게 사면(amnesty) 메시지를 계속 전파해야 한다는 내용을 보면서 바웬사의 통찰력을 실감한 일이 있다.
그렇다. 통일은 행동이고 열정이다. 여건을 만들고 때가 되면 무섭게 결단해야 한다. 통일은 우리 모두에게 재앙이 아닌 축복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대한민국이 앓고 있는 실업, 빈부격차, 노령화의 통증을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부자의 살점을 뜯어 나누어주면 해결될 것인가. 처음 몇 번은 몰라도 계속해서 살점을 내어줄 부자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도 없다. 이런 포퓰리즘이 국민의 갈증만 키우고 나라에 큰 재앙을 몰고 온다는 사실을 지금 그리스 등 여러 나라들이 보여주고 있다. 통일이 가져다 줄 폭발적 시장 확대만이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이 심각한 통증을 치유할 처방이 될 것이다. 그러나 차기 정권을 담당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복지타령에 매달린다. 그들의 맹목(盲目)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다시 말하지만 북한 주민들은 우리 국민이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자유로운 체제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민주적인 정치체제, 더 번영하는 경제체제를 향하여 통일을 이루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통일은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최단 시일 안에 자유와 번영을 누릴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 통일의 결정적 시점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북한 체제엘리트들에게도 어떤 보복이나 차별은 없다. 동독 출신 메르켈을 보라. 그녀가 통일 독일 최고지도자가 되는데 16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나는 통일 이후 그보다 더 빠른 시간 안에 북한 출신 대통령이 등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통일은 그들에게도 축복으로 다가올 것이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의 이 짧은 시를 만났을 때, 나는 비수(匕首)로 심장을 찔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우리에게는 건국의 소명, 산업화의 소명, 그리고 민주화의 소명을 받들다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불태우고 연탄재처럼 차가운 이름을 역사에 남가고 있는 지도자들이 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그 이름에 함부로 발길질하며 차기 정권을 향해 뛰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시대의 소명인 통일을 위해 자신을 불태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
2011. 12
이 인 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