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자 ! 대한민국!
5.18 사기극은 이제 막을 내렸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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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이* 평화로운 나 지만원에게 접근했다.
*1990년대에 나는 **국가경영, 기업경영에 대한 노하우를* *미국 책으로부터 소화하여*
*한국사회에 전파하는 일에 몰두했다.*
*주로 조중동에서 앞다투어 내 칼럼을 요청했고,* *나는 ‘혜성과 같이 나타난 사나이’*
*라느니,**'신선한 충격‘이라느니**’장안의 지가를 높였다‘느니 **온갖 찬사를 들으면서 *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내 소신들을 쏟아냈다.*
* 이로 인해 * *김대중이 사람을 시켜 돈 30만원과 꿀 항아리를 가지고 **내게 접근해 *
*왔고,**그의 요청으로 서울과 중국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통일에 대한 기조연설과 *
*발표를 했다.*
*중국으로 가는 1등칸에서 * *김대중은**자기 부인의 자리와 내 자리를 바꾸라 하여 *
*나는* *그의 옆자리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와 함께 **그 유명한 조어대*
*에서 1주일 동안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며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당시 임동원, 이종찬, 임채정, 천용택, 김상현 등은**먼 식탁들에서 식사를 했다.*
*그리고 돌아와서도 나는**김대중의 요청으로 김대중에게 700만 원 이상을*
*기부한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통일에 대한 나의 논리'를 강연했고,* *김대중은 *
*그 때도 나를 자기 옆 자리에 앉혔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중국에서 친하게 지냈던 박금옥(총무수석)과 김태동, 황원탁(안보수석) 등이 나를 *
*만났고,**김상현이 여의도 만하탄 일식당에서 나와 두 차례 단독**으로 만나 **자리에 *
*대한 의향이 없는가를 타진했지만 *
*나는 당시**장관-국회**의원 부럽지 않은 프리랜서의 생활을 즐기고 있었고, **평생의 *
*소원이 ‘영원한 자유인’이 되는 것이었기에 모두 사양했다.*
심지어는 * *2000년에 홍사덕 당시 한나라당 부총재가 내게 두 번이나 찾아와*
*전국구를 제안했고,* *정책위 의장 자리를 제안했지만 나는 ‘인간공해’가 심한 정치*
*마당이* *싫었고,**나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공간을 잃기 싫어 모두를 **거절했다.*
*소개가 다소 길었지만 이는* *필자가 처음부터 김대중을 미워하고 * *5.18을 미워하고 *
*전라도 사람들을 미워해서* *이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애국적 소명감에서 *
*역사를 연구하다 보니* *그들을 공격하게 되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고 싶어서다.
1995년 10월 25-31일 * *중국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김대중으로 부터* *매일 밤 그가 *
*읽은 많은 독서 내용을 들으면서 * *전두환을 * *용열한 사람이라 믿었고, **김대중을 *
*피해자라고 믿었다.*
*물론 나는 * *1980년 중앙정보부 시절에 * *중**앙정보부 차장실 특별보좌관을 하면서 *
*이른바* *‘S(스페셜)리포트’를 접하면서 * *김대중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김대중의 위장술은 이토록 무서운 것이었다.*
나를 사랑했던 김대중을
내친 것은 햇볕 정책 때문이었다.
*아마도 내게 ‘영원한 자유인’이 되고 싶어 했던 * *인생의 꿈이 없었다면 나는 김대중 *
*시절에 * *세속에서 말하는 출세를 많이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 김대중의 초대 안보특보가 된 임동원이 * *그 유명한 ‘햇볕정책’을 소개하는 자리에 *
*나갔다. **경실련에서였다.*
*후에 보니 강만길, 이철기 등 경실련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 *후에 보니 다 빨갱이*
*들이었다. * *나는 임동원이 대북정책의 불루 북을 발표할 때,** 말 한마디 놓치지 않고 *
*기록을 했다.*
*그리고 김대중과 임동원을 무서운 빨갱이로 단정했다.*
*금강산 사업이 벌어진 이후 나는 매우 확고한 판단을 가지고 * *김대중과 임동원과 햇볕*
*정책을 비판했고, * *이에 김대중은 * *임동원을 통해 나를 2년 동안이나 도청하면서* *사람을 *
*붙여 뒤를 밟았고, * *예약돼 있던 모든 기업 강연을 취소시켰다.*
*무서웠다. 나는 이런 임동원을 상대로 *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고,*
* 이상한 판사들에 의해 겨우 2천5백만원을 배상받았다.*
*이어서 김대중은 * *우리 모두가 다 아는 * *제주 4.3을 뒤집었고, **동의대 사태까지 뒤집*
*었다. **바로 여기에서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하! 내가 1980년에 중앙정보부 *
*보고서에서 읽었던 내용들이** 진실이었구나!”*
*좌익들의 역사변조! * *그 후 나는 5.18을 캐기 시작했다.*
* 이것이 내가 5.18과 악연을 맺게 된 동기였다.*
*2002년 4월 나는 3공에서 * *국회부의장을 지냈던 장경순,*
*베트남 최후의 공사 이대용 장군과 함께 * *대한민국 최초의 우익활동을 시작했다.*
*이것이 우익활동의 효시였다. 필자는 단언한다.*
*김대중을 * *가장 먼저 빨갱이로 단정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내가 김대중을 상대로 싸웠을 때 * *나와 보조를 같이 한 사람은 장경순, 이대용, *
*채병률(실향민회장) 밖에* *없었다,*
* * *나를 가장 사랑했던 *
*김대중이 나를 가장 미워했다
“이제는 나서야 한다”는 피나는 연설은 이때 있었다.*
* 이 테이프를 듣는 사람들은*
* 100% 다 김대중을 골수 빨갱이로 생각했다.*
* 20만개 정도가 확산됐다.*
*이 땅에 김대중을 빨갱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 *아마도 필자의 역할이 *
*일부 있었을 것이다.*
*2007년 말 조선일보가 보도했듯이 * *“김대중이 가장 미워한 사람은 지만원‘이었다.*
*내가 김대중을 빨갱이로 몬 것에 대해서는* *모든 자료들이 있기 때문에 법적으로 *
*탄압할 수 없었다. 그런데 * *유일하게 나를 걸 수 있었던 구절은* *“광주사태는 순수한 *
*광주시민들을 * *소수의 좌익과 북한 특수군이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이라는 * *광고 *
*구절이었다.*
*이는 5공 시절의 역사관이었으며 내가 믿는 확신이었다. **이 구절을 문제 삼아 나는 *
*광주지검 최성필 검사가 지휘하는 경찰들에 의해 안양에서 수갑을 뒤로 채인 채 *
*광주로 6시간 동안 압송됐다. **가는 도중 화장실도 못 갔다.*
*폭력의 대명사 광주를 * *민주화의 성지라니!
*일반인들은 수갑을 뒤로 차고* *단 10분을 견디기 힘들어 할 것이다.*
* 6시간 동안 자식뻘 되는 광주 서부 경찰들과 * *최성필 팀 조사관에 의해 온갖 쌍욕을 *
*듣고 쥐어 박히고 * *죽여서 던져 버리겠다는 협박을 당했다.*
**
* 팔이 붓고 손이 붓고 등짝이 부어 3개월간 고생을 했다.*
*교도소 의무관이 보더니 검찰을 고소 하라고 까지 했다.
101일 동안 있으면서 * *감방의 광주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매우 이상한 것은 *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던 광주인들이 필자를 너무 좋아했던 *
*사실이다. **그들은 필자를 선생님으로 받들었다.*
*5.18단체들이 개자식들이라는 것이다.*
*그들도 5.18단체들을 * *깡패, 양아치들이라 했고,*
* 5.18을 민주화운동이라 하는 데 대해 다 시니컬하게 웃으면서**고개를 흔들었다.*
*한 마디로 웃긴다는 것이었다.*
*이구동성으로* *5.18은 천대받던 양아치들의 잔치였다고 했다.*
* 5.18을 양아치들의 잔치라는 말은* *광주의 유지들로부터도 많이 들었다.*
*광주에는 시외버스터미널이 있다. **필자도 * *소위 시절과 대위 시절에 지나다녔던 *
*음침한 곳이다. **그런 장소에 서식하던 불량배들이 * *광주사태 이후 말끔히 청소되어 *
*참으로 좋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사실 지각 있는 광주시민들은 * *최규하가 광주시를 조기 수복해 준데 대해 매우 감사해 했다.
지만원*